[Oh! 뮤직]엄정화라는 ‘가수 겸 배우’의 의미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12.28 13: 25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엄정화(47)가 지난 26일 SBS ‘SAF 가요대전’에 출연해 신곡 ‘드리머’와 ‘와치 미 무브’을 공개하고, 빅뱅의 탑과 함께 ‘디스코’를 부르며 가수로서 8년 만의 컴백을 알리자 가요계가 들썩이고 있다. 동료가수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을 보내고, 대중은 그녀가 대단한 가수였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듯 환호하고 있다. 엄정화는 뭣이고 누구이기에!
엄정화는 1989년 MBC 12기 합창단으로 ‘업계’에 입문한다. 가수매니저 시스템이 겨우 정착되던 당시 고 배병수 씨는 보기 드문 배우매니저였다. 서울 청량리에서 학원을 운영했던 그는 군대에서 가수 김학래와 만난 인연으로 제대 후 그의 로드매니저로 연예계에 들어왔다 곧바로 독립해 당시 무명이었던 최진실의 매니저를 시작했다.
최진실은 MBC 전속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방송사의 드라마에 자주 출연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당연히 배 씨의 MBC 출입도 잦았고, 거기서 엄정화를 만나 ‘가수 겸 배우’ 탄생에 합심한다.

1980년대는 홍콩영화 및 그 주인공들이 국내 팬들을 장악했던 시절이다. 저우룬파(주윤발) 장궈룽(장국영) 류더화(유덕화) 등은 아직도 추억으로 남아있다. 홍콩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배우로서 스타덤에 오르면 으레 음반을 취입시키는 올라운드플레이어 시스템을 구축해놓은 상태였고, 홍콩스타가 출연한 영화만큼 그들의 음반도 국내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에 비교해 우리나라는 한때 남진과 나훈아가 가수와 영화배우로 동시에 활약한 시대를 빼곤 스타가수가 탄생하면 일시적 흥행효과를 노려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 게 일종의 ‘반짝상품’처럼 기획될 따름이었다. 조용필 김범룡 이은하 이상은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 따라서 엄정화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였다.
엄정화는 1992년 영화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출발선을 떠난 뒤 이듬해 ‘눈동자’를 타이틀곡으로 한 데뷔앨범을 내고 이후 가수와 배우의 영역을 고르게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초창기의 엄정화는 ‘섹시 퀸’이란 별명으로 통했다. 성에 대해 폐쇄적이었던 당시의 분위기에 ‘섹시’라는 ‘금기어’가 당연한 듯 수식된 것도 거의 최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한국 가요계의 마릴린 먼로처럼 소비됐다.
‘눈동자’의 작사 작곡자는 고 신해철. 무한궤도와 넥스트를 거친 록마니아였던 신해철은 ‘눈동자’를 이례적으로 매우 관능적으로 만들었다. 한국의 밥 딜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의 가사와 멜로디가 이토록 육감적이었던 것은 전무후무하다.
초반 4소절의 보컬은 한국 여자가수의 노래에서 찾아보기 힘든 저음으로 전개된다. 그러다 옥타브가 갑자기 상승하는 작곡법과 미디엄템포의 리듬, 그리고 간결하면서도 끈적끈적한 편곡기법은 갓 데뷔한 엄정화의 가수로서의 값어치를 단숨에 최상으로 끌어올려줬다.
신해철이 엄정화를 탄탄한 가수로 데뷔시켰다면 전성기를 열어준 인물은 주영훈이다. 엄정화는 2집에서 김형석의 ‘하늘만 허락한 사랑’으로 발라드도 잘 부르는 가수란 걸 보여준 뒤 주영훈과 손을 잡고 ‘배반의 장미’ ‘포이즌’ ‘페스티벌’ ‘다 가라’ 등 다수의 화려한 히트곡을 남긴다.
물론 중간에 김창환의 ‘몰라’, 박진영의 ‘초대’를 곁들이기도 했다. ‘구운몽’의 전작인 ‘디스코’(2008)는 지누션의 ‘말해줘’에 협업하며 인연을 맺은 YG와 손을 잡은 노래였다.
2000년대에 그녀는 가수보다는 영화배우에 전념했다. 게다가 2010년 갑상선암 수술 중 성대를 다쳐 사실상 ‘가창불가’ 판정을 받은 이후론 무대에 서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서울시장 선거 후보 아내와 여성댄스그룹 리더의 이중생활을 그린 영화 ‘댄싱 퀸’(2012)은 어쩌면 그녀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로 담은 내용이었을지도 모른다.
‘와치 미 무브’는 몽환적인 분위기에선 ‘눈동자’로 되돌아간 느낌이지만 딥하우스 스타일은 트렌드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멜로디 리드 악기를 철저하게 배제한 채 디지털 퍼커션과 베이스 등의 리듬영역을 강조함으로써 보컬과 비트가 서로 애무하듯 진행되는 패턴은 유행에 따른 엄정화의 새 맞춤옷이다.
이에 비교하면 윤상이 작곡한 ‘드리머’는 매우 엄정화답다. 펑키 리듬을 베이스로 깔고 신시사이저 위주의 미디음악으로 꾸민 뒤 마이너 멜로디를 채택한 게 영락없이 주영훈과 손잡고 전성기를 이뤘던 때의 엄정화다.
엄정화는 ‘댄싱 퀸’ 이후에도 ‘미쓰 와이프’(2015)까지 매년 두세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활동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올해 여전히 아이돌그룹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유독 임창정이 돋보였다. 그는 남자로서 ‘가수 겸 배우’의 선두주자다. 엄정화나 임창정이 요즘 배우겸업을 하는 아이돌그룹 멤버 출신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처음부터 가수와 배우를 동시에 시작했고 애초에 연기력 논란이 없었다는 변별성에 있다.
엄정화는 사실 패티김 같은 엄청난 가창력과 음악성의 가수도, 정윤희처럼 독보적인 미모의 배우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오랫동안 가수와 배우로서 타인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하고 지킬 수 있었던 배경은 성실성과 친근함이다.
그녀는 절대 자신의 능력을 맹신하거나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 작품마다 마지막처럼 연기하고, 매 앨범마다 차별화하는 데 각고의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각 감독들을 철저하게 신뢰한다.
또한 황정민이 공식석상에서 찬양했듯 그녀는 ‘연예인병’이 없어 털털하며 정이 넘친다. 혹시 어느 날 밤 주점에서 옆자리에 엄정화가 앉았고, 살짝 취했다면 그건 행운이다. 그녀의 허그를 받을 확률이 높으니까.
17세기 양반인 김만중이 한글로 쓴 소설 ‘구운몽’은 ‘장자’의 ‘제물론’의 호접춘몽(나와 사물은 같다)의 철학과 더불어 무소유를 통한 깨달음의 해탈(불생불멸)을 설파한다. 그야말로 산전수전(배 씨의 죽음, 최진실의 자살, 암 수술 등) 다 겪은 엄정화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새 앨범 제목이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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