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시네마] ‘꿈의 제인’·‘아는 사람’, 부산서 만난 작지만 큰 상상
OSEN 라효진 기자
발행 2016.10.16 14: 26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0일 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국내외의 응원과 우려를 한몸에 받으며 시작한 올해도 영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보기 위한 발걸음은 여전했다. 특히 한국 영화의 오늘 - 비전’ 부문에서는 우리나라 영화계의 미래를 밝게 빛낼 작품들이 관객들과 만났다.
15일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식에 앞서 수상작과 배우들이 발표됐다. 눈에 띄는 것은 CGV아트하우스상과 올해의 배우상 남녀 부문 트로피를 가져가며 3관왕의 영예를 안은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이었다. 단편 가운데는 선재상을 받은 김소윤 감독의 ‘아는 사람’이 돋보였다. 소수자들의 이야기 속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유독 두드러졌던 이번 영화제의 수상작 두 편을 소개한다.
#1. 조훈현 감독, ‘꿈의 제인’

영화는 가출 소녀 소현(이민지 분)의 자기 고백으로 시작한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이 고백이 누군가로 향하는 편지의 내용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사연을 품고 사는 소현에게 편지란 가장 탁월한 매체다. 공허한 배설에 지나지 않을 일기에 비해 수신인이 존재하는 편지는 어찌 됐든 하나의 대화다. 부치든 안 부치든 발신인의 자유지만, 그렇게 빽빽히 써 내려간 이야기에는 언젠가 공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혼자 살아가기에는 아직 어린 소현은 함께 지내던 정호(이학주 분)에게 버림받은 뒤 집을 나온 다른 또래들이 만든 공동체, ‘팸’의 일원이 된다. 소현은 팸의 결속을 위해 심신을 희생하지만, 시키는대로 하면 할수록 숨겨지지 않는 절박함 탓에 그는 팸에서 가장 하찮고 부담스러운 존재다.
그런 소현 앞에 등장한 첫 번째 구원자는 트랜스젠더 제인(구교환 분)이다. 진짜 가족에도 팸에도 권력의 정점에는 ‘아빠’가 있었지만, 제인의 팸에는 ‘엄마’가 있다. 제인은 항상 턱을 치켜든 채 눈을 내리 깐 오만한 표정을 하고도 소현의 이야기를 불평 없이 들어준다. 이 곳에서 소현은 팸의 결속보다 더 개인적인, 정호라는 목표를 제인과 나눈다. 정호에게 외면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살기 위해 이 목표에 매달리며 잠깐의 행복을 맛본다. 그러나 마주하기 두려웠던 현실은 끝내 제인을 구원하지 못했다.
바뀐 시간 속 소현의 두 번째 구원자는 아빠의 팸에 새로 들어온 지수(이주영 분)였다. 하릴없이 스스로를 팸에 구겨 넣었던 소현과 달리 지수는 목적이 분명했다. 돈을 벌어 고모 집에 얹혀 사는 동생과 가족을 꾸리는 것. 때문에 지수는 당당하다. 그러나 그 당당함은 아빠를 흔들고, 팸의 결속을 방해했다. 지수는 정호에게 버림받은 제인과 소현처럼 부담스러운 이물질이 돼 버렸다. 결국 소현이 고통의 삶 속에서 마주친 두 구원자는 세상을 이겨내지 못했다. 소현은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자신의 계속되는 삶 속에 묻고, 처음 팸에 들어갔던 때처럼 제인과 지수가 없는 세상으로 스스로의 등을 떠민다.
‘꿈의 제인’은 시점과 시간을 넘나들며 보는 이로 하여금 누군가의 꿈 속을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그러나 의외로 이 영화 속 인물들이 꾸는 꿈은 단 두 개다. 매일 밤 정호와 연인이 되는 꿈을 꾼다는 제인의 것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거짓이었다는 고백을 하며 소현을 향해 웃는 제인의 모습이 담긴, 처절하면서도 달콤한 소녀의 환상. 각자에게 결핍된 것들의 환상통을 마취하는 꿈을 꾸며, 소현은 죽지 않고 불행하게 살아갈 것이다.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는 심연을 지니고 사는 듯하지만 가장 순수하고 솔직한 제인은 구교환의 말간 얼굴을 만나 더없이 반짝였다. 소현을 연기한 이민지는 사랑 받기 위해 사랑한다는, 가장 비참하고 간단한 삶의 방식을 너무 이르게 터득한 소녀의 공허한 눈으로 극의 전체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2. 김소윤 감독, ‘아는 사람’
‘아는 사람’은 누군가의 고독한 상상에 관한 이야기다. 중년의 남자는 자신이 소유한 무인 빨래방에 설치된 CCTV 화면을 보며 소일한다. 까만 방 홀로 빛나는 커다란 모니터 앞에서 그는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세탁기 말고는 늘 바뀌는 풍경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남자가 있었다.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가져다 놓은 간이 의자와 탁자에 앉아 밥을 먹고 TV만 보다가 나가 버리는 소년이다. 처음엔 괘씸했지만, 보다 보니 그가 괜스레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빨래방 주인은 CCTV의 줌 기능을 이용해 소년이 보는 프로그램이 뭔지 확인하려 하고,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걱정을 한다. 귀에 보청기를 꽂은 채 춤을 추곤 하는 소년을 멍하니 감상하기도 한다. 소년이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빨래방 주인은 그를 향한 연민이 담긴 상상을 시작하게 된다. 손님의 말을 듣지 못해 안쓰러운 청각 장애인 아르바이트생과 그를 무심하게 대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도움을 주는 멋진 자신을.
여느 때처럼 CCTV 앞에서 소년을 기다리던 빨래방 주인은 동전 교환기를 털려는 남자를 발견하고 방을 뛰쳐 나간다. 그 남자는 빨래방 주인이 주시하던 소년이었다. 드디어 소년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 빨래방 주인은 상상과 전혀 다른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김소윤 감독은 19분의 러닝타임 동안 소통의 부재와 거기서 오는 고독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냈다. 일방향 매체인 CCTV와 자신 말고는 볼 수 없는 상상을 연결해 소재로 사용한 것은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적확한 선택이었다. 영화 말미의 반전은 짧은 서사에도 불구하고 여느 장편 못지 않은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