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초점]무관이면 어때…부산에서 건진 한국영화 미래(부산영화제 결산)
OSEN 라효진 기자
발행 2016.10.16 08: 25

몇 년 째 계속된 내홍에 악천후까지 덮쳤지만,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꿋꿋이 개최됐다. 예년보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도 수준 높은 영화들이 대거 출품돼 부산을 찾은 시네필들을 반겼다.
특히 한국 영화 가운데 보는 이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걸작들이 발견됐다.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축된 탄탄한 서사와 배우들의 호연은 한국 영화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비록 수상의 영광은 얻지 못했지만 부산에서 발견한 장편 둘을 소개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쉽게 보지 못한 작품이라도, 몇몇은 서울독립영화제와 서울프라이드영화제 등에서 속속 공개될 예정이니 놓치지 마시길.

#1. 남연우 감독, ‘분장’
한밤 중, 쫓기듯 숨을 헐떡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남자가 있다. 그는 허겁지겁 집 문을 열고는 식칼을 든 채 방으로 들어간다. 언뜻 스릴러 영화의 도입부가 연상되지만, 남자가 칼로 가른 것은 돼지 저금통의 배다. 꼬깃꼬깃한 지폐와 동전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주인에게 도살된 돼지의 배로부터 쏟아져 내린다. 주섬주섬 돈을 챙긴 남자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 기사 앞에서 사정을 한다. 가난한 연극배우 송준(남연우 분)은 택시삯 1만 원이 없어 이 찌질한 소동과 함께 이야기의 서막을 연다.
기약 없는 ‘한 방’에 매달리며 쪼들리는 하루를 버티는 청춘의 고생담은 지겨울 만큼 많이 다뤄졌다. 누군가는 끝내 감동의 성공을 이뤄냈고, 누군가는 새 삶을 찾아 판을 떠났고, 누군가는 비참한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이제는 대충 분위기만 보더라도 이런 사연들이 공유하는 서너 개의 결말들이 도출될 정도다. 그런데 ‘분장’은 더 이상 새로울 수 없을 전개 곳곳을 감독의 재기로 뒤틀고, 새로운 흐름들을 이야기에 갖다 붙여 풍성한 서사를 만든다. 대개 블랙 코미디를 표방하는 작품들이 한없이 ‘블랙’하느라 ‘코미디’를 놓치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곤 했다면, ‘분장’은 장르적 매력을 완벽히 표현한 수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3자의 눈으로 LGBT를 바라본다. 새빨간 남의 성적 지향이 뭐 그리 중요하겠냐만, 그럼에도 혐오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만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오만을 부리는 이도 있다. 송준은 후자다. 트랜스젠더 다큐멘터리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호모포비아 친구에게 인권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막상 남이 아닌 자가 동성애자임을 알게됐을 때 그는 분노를 표출한다. 여태 송준에게 성소수자는 그저 동정의 대상이었고, 화라도 내면 교정될 병리적 현상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송준의 동정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우월감에서 기인한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무명배우라도 그가 이성애자 남성인 이상 잘 나가는 동성애자의 위에 있다는 어떤 불문율. 이는 송준이 이성애자임을 숨기지 않고 살아가도 되는 자연스러움 만큼이나 손쉬운 연민이다. 송준과 트랜스젠더 이나(홍정호 분)는 인정 욕망을 공유하지만, 송준이 이를 채운 후 두 사람 사이의 연대는 간단히 부서진다.
송준의 자기 기만적 태도는 단순히 성소수자를 대할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극 중 연극배우인 송준의 분장은 인간의 내부에 오롯이 스스로 만든 옳고 그름의 기준을 속여야 할 때 쓰는 합리화의 가면과 다르지 않다. 영화 말미 “나 이제 어떡해야 돼”라고 부르짖는 송준의 절규가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는다. 감독 겸 배우 남연우의 연출과 연기는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2. 민제홍 감독, ‘소음들’
텅 빈 집, 자살을 시도하려는 한 남자가 있다. 목을 맬 로프가 걸려 있는 방 안에서 남자는 기도하고, 벗고, 얼굴을 단단히 묶인 매듭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흑백의 화면 위를 전화벨이 두드린다. 여행 중인 남자의 엄마다. 결정적 순간을 방해받은 남자는 귀찮은 듯 대화를 마무리한다. “바쁘니까 빨리 좀 얘기해 주세요. 사랑이요? 엄마, 저도 사랑해요.”
다시 한 번 목을 매려는 찰나, 이번엔 초인종이 울린다. 모르는 여자가 집에 들이닥치더니, 어젯밤 남자가 자신을 불렀다며 빨리 ‘할 일’(?)하고 보내달란다. 그런데 남자는 죽음의 고요만이 감돌던 방 안을 갑자기 메워 오는 이 소음이 퍽 달갑다. 결국 그, 준호(김준호 분)는 죽기 전 며칠을 그녀, 스칼렛(김민지 분)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한다.
영화가 비추는 공간은 준호의 집과 동네가 전부다. 이 단조로운 배경을 다채롭게 만드는 것은 준호와 스칼렛의 대화다. 지난해 출품작인 이충현 감독의 단편 ‘몸 값’에서 발견했던 흥미로운 대본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자기소개로 시작해 느닷없는 고백으로 끝을 맺는 두 남녀의 대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잘 짜여진 디제시스를 구축한다. 쉼 없이 이어지는 준호와 스칼렛의 발화와 이로부터 발생하는 황당한 에피소드들의 중첩을 건조하게 관찰하는 롱테이크는 기발하기까지 하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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