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PO] ‘20이닝 무실점’ 정상호, LG의 가을 무기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6.10.15 06: 17

“책상에 앉아 자료를 보며 생각하다가, 허공을 보다가, 한숨을 쉬다가, 다시 펜을 드는 패턴을 몇 시간 동안이나 반복했다. 옆에서 말을 걸기도 어려웠다”
지금은 kt 소속이자, SK 시절 정상호의 룸메이트였던 김연훈은 정상호의 ‘공부’에 대해 혀를 내두른다. 특히 큰 경기를 앞두면 정상호의 머릿속은 온통 경기 양상에 대한 시나리오 수립으로 가득 찬다. 동료 투수의 강점, 상대 타자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고려한다. 여기에 자신의 감을 섞는다. 프로 16년차의 경험이 녹아든다.
이제 상대의 장단점을 훤히 꿰뚫어 볼 시기지만 정상호의 ‘공부’는 지금도 계속된다. 경기 전날 밤에는 전력분석팀에서 제공한 자료와의 몇 시간이고 씨름한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방을 혼자 쓴다는 것이 다르다”라고 너털웃음을 짓지만 이런 습관은 바뀌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남모를 노력은 올 시즌 가을무대에서 정상호를 빛나게 하는 원동력이다. 든든한 안정감이다.

올 시즌을 앞두고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어 LG로 이적한 정상호는 정규시즌에서의 부진을 가을에 털어내고 있다. KIA와의 와일드카드 결정전 2차전에서는 류제국과 짝을 이뤄 팀 완봉승을 이끌었다. 넥센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도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2차전에서는 0-5로 뒤진 7회 무사 만루에서 ‘구원 포수’로 출장, 봉중근과 배터리를 이이뤄 삼진 1개와 병살타를 유도해 추가 실점 위기에서 벗어났다. 포스트시즌 20이닝 무실점이다.
코칭스태프는 물론 관계자들까지 “정상호의 리드가 역시 안정적이다. 큰 경기 경험이 많은 베테랑의 진가가 드러나고 있다”라고 입을 모은다. 정상호는 이에 대해 고개를 젓는다. 정상호는 “결국 공을 던지는 것은 투수들이다. 투수들이 잘 던지기에 그런 결과가 난 것”이라고 겸손해한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같은 전력분석 자료라고 하더라도 포수들의 순간적인 대처 능력에 따라 선택은 적잖은 차이가 난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 당시 그런 장면이 있었다. 1-0으로 앞선 4회 2사 만루 상황이었다. 타석에는 임병욱이었다. 3B-1S의 불리한 카운트에서 카운트를 잡기 위해 5구째 빠른 공을 요구했고 임병욱은 움직이지 않아 풀카운트가 됐다. 전력 분석만 따지면 임병욱은 변화구에 약한 선수다. 하지만 정상호는 5구째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정상호는 “5구째를 보니 빠른 공을 적극적으로 치고 나가겠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이를 토대로 정상호는 6구도 빠른 공, 7구도 빠른 공을 요구해 결국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고 이닝을 마쳤다. 많은 이들이 변화구를 예상할 때 허를 찌른 것이다. 배터박스의 타자가 풍기는 미세한 흐름을 잡아낸 이 장면은 결국 LG의 5회 3득점으로 이어지며 승리의 결정적인 밑거름이 됐다.
이처럼 정규시즌 부진으로 실추된 자존심을 어느 정도 회복한 정상호다. 그러나 개인적인 목표보다는 팀 성적이 여전히 더 중요하다. 만약 3차전에서 데이비드 허프가 선발로 나선다면 호흡을 맞춰본 경험이 더 많은 유강남의 선발 출전이 확실시된다. 다소 아쉬울 수도 있지만 정상호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정상호는 “비디오로는 많이 봤지만 실제 공을 받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실제 같이 뛰어봐야 투수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 투수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다”라면서 “벤치의 결정을 존중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진가를 증명한 정상호의 쓰임새는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 단기전에서는 이런 임무를 해줘야 할 선수들이 있는 법이다. /skullbo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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