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톡톡]‘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감독의 복합시각
OSEN 라효진 기자
발행 2016.10.01 09: 23

이재용 감독의 신작 ‘죽여주는 여자’에는 매우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이 담겼다. 먼저 ‘박카스 아줌마’로 불리는 노인 매춘이 바탕에 깔리고, 그 위에 사회적 소수자와 코피노 이야기, 노인 빈곤과 존엄사 이슈가 차곡차곡 쌓인다.
이 복합적인 문제들은 극 중 ‘박카스 할머니’ 소영(윤여정 분)과 이웃들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든다. ‘38따라지’ 소영은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뒤 식모도 해 봤고, 공순이도 해 봤다. 어쩌다 보니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동두천까지 흘러들어갔고, 젊은 시절을 양공주로 보냈다. 남에게 손 한 번 벌리지 않고 살아 왔다는 자부심이 있지만, 배운 게 그 것 뿐이니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종로를 전전할 수밖에 없다.
파고다공원에서는 이미 ‘죽여주는 여자’로 소문난 소영은 성병 때문에 찾은 산부인과에서 한 꼬마를 발견한다. 의사가 필리핀에 가서 만들어 놓고 버린, 소위 코피노다. 아이의 엄마가 자신을 내친 의사의 가슴에 가위를 꽂는 소동이 발생한 사이 소영은 꼬마를 데리고 집에 와 버린다. 양공주 시절 더듬더듬 배운 영어로 말을 걸어 보지만, 아이는 말이 없다. 트렌스젠더와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가 오순도순 나눠 쓰는 집에서 소영과 꼬마 민호의 동거가 시작된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었어도 박카스 할머니에 불과한 소영은 넉넉치 않은 살림을 떼어 가면서까지 민호를 지극정성 보살핀다. 죽지 못해 살아가던 소영에게 이 아이를 잘 먹이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영은 임질 탓에 ‘아래로는 못 하는’ 상황에서도 열심히 일한다. 청년이고 노인이고 가리지 않고 “나랑 연애할래요?”라고 묻는다. 모텔비 포함 3만원에 그 ‘죽여준다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담배 두 갑에 민호를 맡아 주는 도훈(윤계상 분)과 집주인 티나(안아주 분)도 그런 소영의 고통을 기꺼이 분담한다.
형편에 비해 과한 공감능력을 가진 소영이 이처럼 건조한 일상에 온기와 활기를 찾아가는 도중, 감당하기 힘든 타인의 삶이 그의 마음을 두드린다. 정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말년을 맞았지만 죽을 힘도 용기도 없는 노인들이 소영의 ‘죽여주는’ 서비스를 요구한다. 한때 인연을 맺었던 이부터 소개를 받고 찾아오는 이도 있었다. 반푼이라도 남자를 데려가야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에서 ‘죽여주는 여자’ 소영은 과연 잔 다르크 같은 존재였다.
이중적 의미의 ‘죽여주는 여자’가 된 소영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고,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늙은 창녀에 살인범까지 돼 버린 소영이지만 그 속사정을 알고 나면 무작정 돌팔매질을 할 수 없어진다.
이재용 감독은 이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단 111분의 영상으로 압축해내는 신기를 보여 줬다. 전혀 다른 모양의 문제들이 한 공간에서 얽히고 설키지만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도 소홀하지 않게 다룬다. 가치판단 대신 담담한 시선으로 시대를 조명한 덕에 오히려 보는 이들에게 생각의 여지가 열렸다.
배우 윤여정 말고는 소영 역할을 해 낼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노인의 성 관련 다큐를 찍겠다는 초짜 감독이 소영의 양공주 시절을 언급하며 “미군들을 상대하신 건가요?”라고 묻자“그럼 일본군 상대했겠어? 그 정도로 늙진 않았어”라고 퉁박을 놓는다거나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생의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라는 말에 “안 도와주셔도 돼요”라고 받아치는 위트를 윤여정이 아니라면 그 누가 소화할 수 있을까. 그의 반 백년 연기 인생이 ‘죽여주는 여자’ 소영을 만들어냈다. 칠순의 패셔니스타가 보여 주는 멋진 착장들도 이 영화의 볼거리가 될 듯하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죽여주는 여자’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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