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뮤직]‘고산자’ 김정호 말고 가수 故김정호 아시나요?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09.16 10: 34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개봉으로 조선에서 가장 많고 정확한 지도를 만든 후기의 실학자 겸 지리학자 김정호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미하지만 사가와 작가들은 그가 억눌린 민중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현대 우리 가요계에도 대중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다 짧게 살고 떠난 동명의 천재적 예술가 한 명이 있었다. 1952년 3월 27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1973년 ‘이름 모를 소녀’를 타이틀곡으로 한 데뷔앨범을 발표하자마자 스타덤에 오른 뒤 1985년 11월 29일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싱어 송라이터 김정호(본명 조용호)다.
솔로로 데뷔하기 이전에 포크듀엣 사월과오월의 3기 멤버로 활약했고, 어니언스의 ‘작은 새’ ‘사랑의 진실’ ‘저 별과 달을’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 작사했다. 솔로로서 총 4장을 앨범을 발표했는데 대표곡은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나그네’ ‘인생’ ‘날이 갈수록’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그리고 죽기 직전 녹음한 ‘님’ 등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국악인이었고 외삼촌도 아쟁의 명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을 낳고 키운 외할머니가 바로 담양 출신 판소리 명창 박동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호의 음악과 창법 그리고 정서는 국악을 기초로 블루스 록 재즈 등의 크로스오버 형태다. 그가 작곡을 할 당시 가요계는 포크와 가요가 양분하던 시대여서 흔히 그의 음악을 포크로 분류하지만 단순히 통기타 음악으로 불리던 포크로 규정하기엔 그의 음악은 매우 규모가 크고 버라이어티하다.
그의 대명사라 할 ‘하얀 나비’만 하더라도 재즈의 스윙 셔플 부기우기 등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히트곡 대열에선 다소 멀지만 실질적인 유작이라 할 ‘님’은 그의 골수팬들에겐 매스터피스고, 한국 가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가요계의 흑인음악은 신중현이 주도하는 소울을 기반으로 한 록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김정호는 ‘님’에서 국악과 블루스를 절묘하게 결합해 가요계에 커다란 혁명의 이정표를 남겼다.
끈적끈적한 브라스섹션과 일렉트릭 기타가 이 곡의 편곡의 선두에 섰다는 점부터 그렇다. 김정호의 선창과 이에 답하는 일렉트릭 기타의 간주는 블루스의 기본인 콜앤리스펀스 형식이고, 기타는 블루노트 스케일을 살짝살짝 드러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바로 상여곡과 블루스를 넘나드는 김정호의 창법이다. 그의 꺾고 돌리는 창법은 절묘하게 가요와 블루스를 결합하고 있으며 머리 꼭대기와 가슴의 밑바닥에서 동시에 끌어올린 듯한 톤과 한의 정서는 그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그만의 감정을 쥐어짬으로써 청자의 심금을 최대한 흔들어놓는다.
1970년대 포크는 저항정신으로 이미지화됐지만 김정호는 삶에 대한 진지한 철학을 노래하다가 결국엔 짙은 염세주의에 탐닉하면서 결론을 지을 뿐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하루해도 저물어. 흘러든 별빛 사이로 나는 잠이 들어가네. 세월아, 쉬어 가려마, 꿈을 꾸는 나를 위해, 흠~. 세월은 가고 나를 따라 늙어간다. 인생, 인생이란 바람 따라 가는 구름’(‘인생’)
이게 바로 김정호의 철학이고 이데올로기였다. 그에겐 정치나 욕심이나 이념투쟁이나 경제관념이나 이런 세상의 소소한 일상이나 그것을 넘어선 야욕 따윈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삶 자체가 슬펐고, 부정적이었으며, 그래서 육체만큼 영혼도 앓았던 듯하다.
김정호의 값어치는 지금처럼 미디어산업과 공연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을 열광케 했고, 천재적인 음악성을 발현했으며 한국의 역사에 한국인이 다친 아픔을 대변하고 달래주려 했다는 데 있다. 한국적인 블루스, 록, 포크 등의 선구자라는 데만 있지 않다. 그는 ‘눈물 젖은 두만강’ ‘알뜰한 당신’ ‘애수의 소야곡’ 등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 대중의 고통을 대변하고 아픔을 위로해준 가요도 리바이벌하며 ‘한국적 정서’를 널리 알리고 그 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건강이 나빴다. 하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더욱 비극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의 소나타와 칸타타는 레퀴엠보다 더 처절한 카오스의 절규이자 번뇌의 몸부림을 승화한 해탈의 스케르찬도(해학적 연주)에 가까웠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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