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초점]송강호? 이런 여우같은 배우를 봤나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09.07 08: 55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 영화 ‘밀정’(김지운 감독,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배급)은 9월 7일 개봉을 앞두고 대체로 호평 속에 기대감을 키우지만 일각에선 전체 얼개의 엉성함에 대한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누아르 형식의 스타일은 썩 멋들어지지만 주인공인 이정출(송강호)의 방황과 갈등과 변절 그리고 마지막 소신 등이 동기가 불확실함으로써 전체의 개연성을 떨어뜨린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무마하고 다독이며 잘 꿰맞춰 완성하는 것은 바로 송강호의 연기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생존의 본능, 분노와 굴욕, 갈등과 번뇌, 선택과 신념 그리고 믿음의 다양한 감정을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표현해냄으로써 자칫 겉모습은 완벽하지만 내부설계에 하자가 있는 최첨단 로봇이 될 뻔한 작품을 정말 ‘작품’으로 완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20년대 경성과 상하이. 의열단 핵심 단원 김장옥(박희순)이 투쟁 자금 확보 작전을 수행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을 때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경찰들의 화려한 몸놀림이 액션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다음부턴 주요 인물들의 심리전을 보여주는 얼굴표정과 섬세한 몸동작 하나하나가 곧 미장센이다.

주인공은 상하이임시정부에서 김장옥과 함께 일하다 변절해 일본 고등경찰이 된 이정출(송강호) 경부와 의열단의 2인자로서 경성에서 고미술상 사업가로 위장한 김우진(공유)이고, 서브는 정출의 상관인 경무국 히가시(쓰루미 신고) 부장과 정출처럼 일본의 앞잡이가 된 조선인 출신 하시모토(엄태구)다.
정출은 히가시의 명령으로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을 잡을 목적으로 김우진에게 접근하고 우진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듯, 모르는 듯한 정출의 계산을 또 두드려보면서 그와 가까워지는 척한다. 히가시 역시 겉으론 정출을 무한정 신뢰한다며 하시모토를 조력자로 붙여주지만 그건 명목상일 뿐 정출을 감시하기 위함이다.
이정출이 김우진에게 접근하자 서로는 서로의 미끼를 물어 곧바로 바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형-동생 관계를 맺는다. 이 시퀀스에서 송강호의 명연기는 빛나기 시작한다. 이 훌륭한 심리 누아르의 출발은 사실상 여기서부터다. 우진은 살짝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억지로 띠워주기도 하지만 정출은 오히려 솔직하다. 그게 어색하지 않고 굉장히 긴장되면서도 마치 그 술자리의 주인공이 된 듯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원인은 바로 송강호의 힘이다.
일본 경찰의 압박이 심해지자 상하이로 도주한 우진은 채산과 마주한다. 정출의 속셈을 밝히자 채산은 오히려 “적의 첩자를 우리 첩자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우진은 자신을 속여 채산을 잡기 위해 상하이까지 온 정출을 채산에게 데려간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폐 안 끼칠 테니 경성까지 무기를 운반하는 것을 딱 한 번만 눈 감아 달라”는 것.
이 시퀀스 역시 어색하다. 정출은 오로지 생존의 논리로 움직이지, 명분이나 신념 따윈 담 쌓은 지 오래된 인물이다. 우진은 자신에게 접근한 정출에게 슬그머니 동업을 제안하고 이때 정출은 은근히 욕심을 드러낸다. 송강호의 ‘복잡미묘’한 표정연기력은 여기서 빛을 발했다.
기차 안에서의 정출 우진 하시모토 연계순(한지민)의 심리전은 한국 영화 기차 신 중 단연 최고라 해도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특히 하시모토와 우진을 번갈아가며 만나면서 당황하고 곤혹스러워하며 능청을 가장하는, 톤이 어긋나는 목소리와 어설픈 동작을 소화해내는 정출, 즉 송강호의 표현력은 정점에 이른다.
정출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변신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변절은 취사선택일 따름이다. 그래서 배신은 그냥 여러 생존이론 중 하나에 불과하다. 거부감이나 역겨움보단 오히려 연민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인트로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장옥에게 수십 명의 일본 경찰이 총을 겨누자 그가 앞장서 “부장님이 생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며 장옥을 살리려 하는 장면부터 관객들은 그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것이고 그것은 러닝타임 내내 이어지다가 결말에서 비로소 송강호의 연기력에 놀아난 것을 알고는 무릎을 탁 칠 것이다. ‘이런 곰 같은 여우 봤나’라고. 송강호는 왼쪽 눈이 오른쪽의 그것보다 크다. 수시로 그는 오른쪽 입꼬리를 내림으로써 각기 다른 양쪽 눈과 함께 표정연기로 활용한다. 참으로 속을 알 수 없는 밀정 같은 배우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밀정'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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