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초점]걸크러시 열풍, 그 뷰티풀 스틱스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08.19 09: 32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지난해부터 갑자기 인터넷 연예매체를 통해 유행되기 시작한 걸크러시는 소녀(Girl)와 반하다는 크러시 온(Crush On)을 합성한 단어다. 옥스퍼드 사전은 ‘여성이 성적인 감정을 제외한 채 다른 여성에게 느끼는 강한 호감’이라고 썼다. 즉, 뛰어난 지덕체를 갖추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성공했기에 여자들이 닮고 싶어 하는 여자 동경의 대상, 혹은 그런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을 뜻한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된 KBS2 ‘언니들의 슬램덩크’는 MBC ‘나 혼자 산다’의 대항마다. ‘나 혼자 산다’가 혼기가 꽉 찼거나 이미 넘쳤음에도 혼자 사는 남자들의 얘기라면, ‘언니들의 슬램덩크’는 시청자들이 컬크러시를 느낄 만큼 성공한 ‘센 여자들’의 걸그룹 도전기다. 둘 다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만드는, 사회현상을 반영한 포맷이다.
음원차트를 보면 ‘언니들의 슬램덩크’의 언니쓰가 비로소 그토록 그리던 걸그룹 데뷔에 성공한 노래가 버젓이 올라있다. 뿐만 아니라 Mnet ‘프로듀스 101’을 통해 선발돼 데뷔한 아이오아이의 노래를 비롯해 소녀시대 씨스타 태연 등 걸그룹 혹은 그 유닛의 노래들로 도배되다시피 한다. 바꿔 말하자면 아이돌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예전과 달리 보이그룹보다 걸그룹이 강세다.

지금의 아이돌 전성시대의 발판이 된 1990년대초에 서태지와아이들 듀스 등 남성그룹이 리드하고 투투 룰라 등의 혼성그룹이 따라온 뒤 베이비복스 등이 문단속을 했듯 말에 다시 HOT 젝스키스가 리드하고 SES 핑클이 뒤를 이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서면서 변했다. 걸그룹이 보이그룹과 동등하게 일직선상에 서는 듯하더니 어느새 슬그머니 앞장서기 시작했다. 빅뱅 엑소 인피니트가 강하다고 하지만 소녀시대 원더걸스다 씨스타는 아직도 그들에 못지않다. 그건 비교대상이 못 된다. 여자친구가 그 누구도 부인 못할 대세로 떠오른 가운데 러블리즈 블랙핑크 등이 보이그룹의 기세를 짓누르고 있다. 지상파 방송3사의 주말 가요순위 프로그램을 통해 매주 새로운 보이그룹이 등장하지만 걸그룹만큼 대중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걸그룹의 컨셉트도 바뀌었다. AOA까지만 해도 모든 걸그룹의 이미지는 섹시였다. 초저녁 지상파 방송사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가요순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모든 걸그룹은 벗지 못해 안달이었고, 골반을 비비 꼬지 못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크레용팝을 계기로 캐릭터 설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싸구려 가판대의 일회성 주간지가 옐로우저널리즘의 스포츠지에 밀려나고, 이젠 아예 그 가판대의 상권이 인터넷에 밀려났듯, 성상품화의 한계에 부닥친 것이다.
그런 변화는 오히려 걸그룹의 경쟁력을 키워줬고, 생명력을 강화시켰다. 성적인 이미지를 부각함으로써 ‘삼촌팬’들을 끌어들여 인지도와 상품성을 키웠던 마케팅 방식은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TV에서 아버지와 딸이 한자리에서 걸그룹의 율동을 감상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 됐다.
일찍이 미쓰에이는 ‘남자 없이 잘 살아’라고 노래 불러 아버지와 삼촌은 물론 어머니의 얼굴까지 흐뭇하게 만들었다. 여자친구의 꿈과 희망을 노래한 ‘너 그리고 나’는 부모들이 자식에게 가르치고 싶은 교육을 대신한다.
1970년대 대학가 시위현장의 대표곡이 ‘아침이슬’이었다면 80년대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얼마 전 총장의 일방적인 미래라이프대학 신설에 반대하는 이화여자대학생들의 시위현장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불린 것은 걸그룹이 왜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랑받는지 시사한다.
1984년 이선희가 MBC 강변가요제에서 ‘J에게’로 대상을 받은 뒤 단숨에 정상에 오른 배경에는 여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음을 누구나 다 안다. 이전까지 조용필과 전영록에 환호했던 상당수의 여학생들이 왜 이선희에게 옮겨갔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만 해도 성인남녀가 공공장소에서 애정표현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퇴폐행위였다. 대학생의 공개연애도 부모 눈치를 봐야 할 정도였으니 중고생이 이성교제를 한다는 것은 무조건 부도덕이자 학생의 본분을 망각한 일탈이었다. 사회는 그렇게 중고생의 낭만과 청춘을 일방적 잣대로 규제하고 있었다.
이선희는 치마를 안 입는 여가수로 유명했다. 헤어스타일도 남자들의 대표적 환상인 긴 생머리가 아니라 쇼트커트였다. 8등신의 늘씬한 몸매에 사자머리를 하고 화려한 화장으로 관능미를 뽐내는 미스코리아와는 정반대편에 서있었다. 그런 중성적 매력이 여학생들의 대리만족 욕구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그건 1988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상은이 다시 한 번 입증한다. 그녀는 그해 MBC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로 대상을 차지한 뒤 자신의 세상을 열었다. 180cm에 가까운 껑충한 키에 비쩍 마른 몸매의 선머슴 같은 그녀가 탬버린을 힘차게 흔들며 뜻 모를 의성어 담다디를 반복하자 4년간 이선희에게 집중돼있던 여학생들의 일편단심은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변했다. 미성년자라도 거리에서 거리낌 없이 이성친구와 스킨십을 하고 입을 맞춰도 법에 저촉되지 않고, 누가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여학생들은 걸그룹에 열광할까?
그건 ‘아재들’이 ‘삼촌팬’이란 ‘팬덤’으로 걸그룹의 인기를 지지해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30~40대 ‘삼촌’들 중 혼자 사는 사람은 상당수다.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비정규직이거나 무직자다. 게이라서가 아니라 연애나 결혼을 할 능력도, 그런 희망을 품을 여유도 없어서 혼자인 것이다.
10~20대에 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소수의 ‘8학군’은 대치동 일대에 거주하며 고액과외를 통해 어느 정도 내일의 설계도를 그릴 수 있고, 그 외 전국의 ‘금수저’들 역시 탄탄한 부모의 ‘힘’을 배경으로 이미 행복을 보장받고 있다. 하지만 다수의 ‘비 8학군’은 서울 시내의 4년제 대학을 나와도 설계도의 시안조차 찾을 수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10대 후반~20대 초반에 데뷔해 스타덤에 오른 걸그룹은 대리만족의 환상인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다. 왜 요즘 각 연예기획사에 연예인 지망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지 답이 들어있다.
어차피 대기업의 부장 자리는 하나다. 그 1%에 오를 사람은 이미 예정돼있고 다수의 ‘평민’은 그저 들러리일 따름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걸 잘 알고 있고, 또 눈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어차피 오르지 못할 나무라면 더 원대한 꿈을 꿔보는 것도 괜찮다. 일장춘몽이라면 더욱 거창하게 꾸는 게 일시적으로나마 엔도르핀이 더 풍성하게 넘친다.
소녀들은 걸그룹을 보고 스타일의 아바타로 삼고, 자신의 ‘마니또’로 여기는 상상 속에서 언젠가 그 무대에 설 자신을 꿈꾼다.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걸그룹처럼 입고, 친구들과 놀 때 걸그룹의 춤을 흉내 낸다. 노래방에 가면 미인이건 추녀건, 젊었건 늙었건, 차림새와 율동만큼은 죄다 걸그룹이다.
사람은 누구나 제가 언젠간-그것도 머지않아-죽을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등바등 살아보려고 노력하는데 그건 희망과 구원을 믿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에 공포를 느껴서가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잃을 게 많기 때문이다.
그럴 땐 현실을 발판 삼아 목표를 설정하고 기적에 한 표를 던지는 게 현명하지만 내일을 믿지 못하고 희망에 불신을 품는 다수는 무조건 비현실에 몰표를 주기 마련이다. 낙관이 비겁한 현실도피라면, 비관은 허무한 자아부정이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불확실이란 욕망에 침윤하는 호접몽이다. 걸그룹은 죄다 아름답지만 그 전성시대의 발판 밑엔 이런 비극의 스틱스(그리스신화의 저승의 강)가 흐르고 있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YG, 여자친구, 아이오아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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