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무비]‘터널’ 재난영화? 유쾌 상쾌 통쾌 '3쾌' 스릴러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08.09 08: 55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재난영화는 할리우드가 오랫동안 즐겨 사용한 블록버스터이자 텐트 폴 무비다. 하지만 영화에나 있을 법한 엄청난 자연재해가 현실화되는가 하면 그 이상 가는 재앙이 사람에 의해 창조되는 가운데 ‘타이타닉’의 대성공으로 더 이상의 자극적 소재가 바닥을 드러냄에 따라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그래서일까? 한국 영화계엔 ‘타워’(2012)가 5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혹평으로 남아있는 가운데 재난 소재에 인색하고, 관객 역시 지난해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재난영화 ‘샌 안드레아스’(171만 명)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인 바 있다.
그런데 ‘터널’(김성훈 감독, 쇼박스 배급)은 많이 달라 세월이 흐를수록 재난영화에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관객들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하다. 영화 관계자들 역시 시선의 변화의 계기로 삼을 법하다. 영화는 재난의 장르란 외피를 쓰고 있지만 정치인 공무원 언론인 등을 조롱하는 가운데 요소요소에 코미디를 많이 심어놔 손바닥의 땀만큼 유쾌한 웃음을 유발한다.

장르 비틀기에 남다른 소질을 지녔다는 김 감독의 명성이 다시 한 번 입증되는 장르적 변화의 계기의 한 축이 될 법한 영화다.
때는 늦가을 혹은 초겨울. 기아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38살의 평범한 가장 정수(하정우)는 주변에서 흔히 볼 법한 아내 세현(배두나)과 어린 딸과 같이 강원도 하도(가상의 도시)에 사는 서민이다. 그는 딸의 생일을 맞아 케이크를 산 뒤 승용차를 몰아 주유소에 들른다. ‘3만 원어치’라고 주문했지만 ‘알바’ 할아버지가 귀가 어두운 바람에 ‘만땅’ 주유해 살짝 기분이 상하지만 이내 생수 2병을 챙겨주는 할아버지를 이해해준다.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3만 원어치 주유했으면 정수는 더 빨리 출발할 수 있었지만 9만7000원어치 3배나 주유하는 바람에 출발시간이 지연됐다. 그렇게 다시 출발한 정수는 개통된 지 한 달 된 하도터널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천장이 무너져 내리면서 붕괴된 터널 안에 고립된다. 구조요청을 받고 현장에 도착한 119 대원들은 상황이 심각함을 깨닫고 상부에 보고하고, 국민안전처 장관 김영자(김해숙)는 대경(오달수)을 대장으로 한 구조본부 구성을 지시한 뒤 온 국민의 관심이 이에 쏠리자 직접 현장을 방문해 자신의 성실함을 과시한다.
구조대의 예상과 달리 날짜는 지꾸 지연된다. 정수는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라고 한탄하는가 하면, “3만 원어치만 주유했다면”이라고 아쉬워한다. 할아버지를 원망하거나 저주하진 않는다.
휴대전화 배터리는 80%로 비교적 여유 있고, 연료는 ‘만땅’이며, 케이크와 생수 2병이 있으니 일단 생존의 조건은 어느 정도 갖췄다. 대경은 패트병에 눈금을 긋고 아껴 마시라고 생존요령을 가르쳐준다. 대경에게서 구조될 수 있다는 다짐을 받은 정수는 이제 무료함을 느낀다. 유일하게 잡히는 라디오 클래식 채널이 유일한 취미고, 조명을 켰다 껐다 하는가 하면 트렁크를 뒤져 잡동사니를 확인해보는 게 유일한 오락이다.
시간이 자꾸 지체될수록 현재의 자신과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의문이 든 정수는 “나 살아있는데”라고 애원하듯, 체념하듯 뇌까리지만 이는 다시 “산 게 산 걸까”라는 자조 섞인 탄식으로 바뀐다.
영화는 촘촘하기보단 쫀쫀하고, 웅장하기보단 웅대하다. 전자는 유머가 그렇단 얘기고, 후자는 메시지와 풍자가 그렇단 의미다. 물이 떨어진 정수에게 대경이 세균이 없으니 소변을 마시라고 생존요령을 가르쳐주자 정수는 “소변 마셔봤냐”고 되묻는다.
종이컵을 입에 물고 소변을 보려던 대경은 문득 깨닫고 커피를 버린 뒤 소변을 받아 마신 다음 정수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마셔보니 괜찮다. 다만 식혀서 마시는 게 좋다”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함께하려는 끈끈한 동지애를 보여준다.
정수는 딸에게 줄 케이크와 이 사태를 유발한 할아버지가 사은품으로 건넨 물로 연명했다. 그런데 그렇게 아껴먹던 케이크를 어디선가 나타난 한 애완견이 한꺼번에 다 먹어버렸다. 그때 그가 느끼는 감정은 절망도 분노도 아니고 소박한 짜증과 당황일 따름이다. 그리고 강아지의 입 언저리에 묻은 사료 한 알을 발견하곤 사료봉투를 찾아낸 다음 강아지와 마주앉아 몇 알씩 나눠먹으며 그것조차 놀이로 승화시킨다.
이렇듯 절박한 죽음 앞에서의 고립상황에서 정수는, 그리고 감독은 소소하면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삶을 즐기고 관객에게 풋풋한 웃음을 선사한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다.
그리곤 조롱과 풍자와 은유 등으로 언론 정부 공무원 그리고 다수의 잔인한 이기주의와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비웃는다.
정수가 터널 안에서 케이크와 생수 두 병으로 향후 생존을 계획할 때 현장 근처로 찾아온 뒤 구조대 측이 마련해준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식당에 홀로 앉아 저녁식사를 하려고 밥그릇 뚜껑을 연 세현은 이내 뚜껑을 닫는다. 시간이 한참 흘러 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의 식사를 도와주던 그녀가 “힘내라”며 달걀 프라이를 나눠주는데 갑자기 쏟아진 비로 인해 한 대원의 프라이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세현이 미안해하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흐르는 빗물에 프라이를 헹궈 한입에 털어 넣는다. 사람이 개와 사료를 다투고, 계란이 때론 분노의 표출이 되는가 하면 때론 사람과 사람을 잇는 정이 되는 이 시퀀스들 속에는 어쩌면 이 세상을 사는 누군가는 터널에 고립된 정수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은유가 담겨있다.
국민안전처 장관은 현장에서 사진 찍기 바쁘고 구조작업이나 제2터널 발파작업 재개 등으로 문제가 생기면 “잘 협의해서 하라”는 지시만 남기고 다음 스케줄을 위해 이동한다. 제2터널 공사중단으로 인한 손실과 신도시 시민들의 생활의 불편이란 문제가 제기되자 공청회에 나선 터널 관계자는 “저번엔 도롱뇽 하나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며 이번 공사 재개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러자 들러리로 좌석 하나를 차지하느라 구조작업이 지연되는 게 불만이던 현장의 대경은 “여기에 고립된 것은 도룡농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항변한다. 한 기자는 정수의 고립 17일째 대경이 구할 수 있다고 말하자 “하루만 더 있으면 삼풍기록을 깨는데”라고 아쉬워한다. 감독은 이렇게 대놓고 정부와 공무원 그리고 언론의 무사안일과 성과주의 등에 날선 검을 들이댄다. 장관의 대 언론 발표 현장에 개들이 짖는 장면을 이어붙이는 도발도 서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재난영화의 고전 ‘타워링’이나 세련된 ‘타이타닉’의 스펙터클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이미 일본의 쓰나미의 재앙이란 현실을 TV로 본 대중은 더 이상 영화가 그리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천재지변에 대해선 감각이 무뎌질 대로 무뎌졌기에 사실 그런 시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김 감독이 영민하다는 것이다. 자칫 늘어질 수 있는 고립된 한 주인공의 리드 시퀀스에 휴대전화 조명과 차내 조명 등 리얼한 상황 조명을 사용하는가 하면 공간감을 최대로 활용한 카메라워크로 긴장감을 주면서도 대사와 상황극으로 쉴 새 없이 코미디를 생산해내는 가운데 재난영화가 아니라 블랙코미디 사회풍자극임을 자처한다.
정부가, 아니 이 사회가 다수의 권익과 편리를 위해 ‘단 한 명’을 죽었다고 이미 단정해버릴 즈음 딱 한 명은 예외다. 대경은 말리는 동료의 팔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믿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이대로 가버리면 비겁하잖아”라고.
그건 당선(혹은 임명)만 되면 예전의 모든 공약을 뒤로 한 채 당리당략 혹은 사리사욕 또는 자리보전이나 진급을 위해서만 눈에 핏발을 세우는 적지 않은 지도층 인사들에 대한 통쾌한 일갈이다. 믿게 만들었으면 약속을 지키라는. 매몰상황은 절박하지만 유쾌한 유머가 살아 숨쉬고, 구조과정은 지난하지만 성실한 일선 공무원들의 고군분투는 상쾌하며, 마지막 시추에이션은 통쾌하다. 12살 이상 관람 가. 8월 10일 개봉./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터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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