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레터] 비누 냄새 나는 변태?…‘덕혜옹주’ 박해일의 연기 변천사
OSEN 라효진 기자
발행 2016.08.05 17: 48

작가 강신재가 쓴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깨끗하고 풋풋하면서 싱그러운 첫사랑의 느낌, 배우 박해일을 떠올릴 때면 드는 감상이기도 하다.
깎아 놓은 밤톨처럼 모난 데 없는 부드러운 얼굴선과 항상 촉촉하게 젖어 있는 눈빛, 맑은 피부만 봤을 때는 박해일에게 ‘국민 첫사랑’이라는 수식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팬들이 애정을 담아 그에게 붙여 준 별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비누 냄새 나는 변태’다. 뽀송뽀송한 외모와는 다른 거칠고 과감한 역할들에 도전해 왔던 덕이다.
포털사이트 프로필에 자진해서 증명사진을 게재하고, 정자로 싸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정직한 면모도 그의 독특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 주효했던 것이 사실. 그래서 배우 박해일이 관객들에게 선사해 온 비누 향기의 면면들을 살펴 봤다.

#1. ‘국화꽃향기’의 서인하
미국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대학 입학을 위해 한국으로 온 서인하는 국화꽃 향기가 나는 민희재(故장진영 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소심한 인하는 자신의 마음을 선뜻 고백하지 못했다.
인하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희재에게 사랑을 전하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인하는 라디오PD가 되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한 번 희재를 향한 마음을 띄워 그녀의 연인이 됐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희재를 덮친 불치병이라는 시련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 박해일은 오랫동안 품어 온 사랑이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슬퍼지더라도 이를 지키려 하는 절절한 순애보를 보여 주며 관객들의 마음 속에 진한 향기를 선사했다.
#2. ‘살인의 추억’의 박형규
‘비누 냄새 나는 변태’라는 별명의 시작은 이 영화로부터 비롯됐다. 극 중 연쇄 살인의 용의자로 지목된 박형규는 살인은 커녕 무단횡단도 하지 못 할 것 같은 얼굴이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물기 어린 눈망울을 한 그가 억울한 표정을 지을 때면 그를 범인으로 몬 박두만(송강호 분)을 원망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그러나 정황 증거는 전부 박형규를 살인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관객들은 헷갈린다. 이 아름다운 청년이 혹시 끔찍하게 여자들을 죽인 범인이 아닐까 하고. 아직도 진범이 누구인 지 알 수 없지만, 박형규를 연기한 박해일의 눈빛만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3. ‘연애의 목적’의 유림
맡는 역할마다 맞춤 옷처럼 소화해 내는 박해일이 제대로 변태 연기를 펼친 영화다. 영화 속 영어 교사 유림은 학교에 부임한 미술 교생 홍(강혜정 분)에게 끊임 없이 수작을 거는데, 이 노골적인 작업 방식은 박해일의 연기를 통해 극도로 자연스럽게 표현됐다.
생긴 것은 선비처럼 생겨서 시도때도 없이 음담패설을 내뱉고, “사귀자” 보다는 “자고 싶다”고 말하는 그에게 누군가는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이 같은 능청스러움이 유림의 전부는 아님을 알 수 있다. 홍의 상처도, 자신의 상처도 치유해 내는 용기가 변태적 면모를 상쇄한다.
#4. ‘은교’의 이적요
박해일은‘은교’를 통해 첫 노역에 도전했다. 검버섯이 핀 주름투성이 얼굴로 새하얀 소녀 은교(김고은 분)을 욕망한다.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해 축 늘어진 육신을 거울에 비춰 보며 한숨을 쉬는 그의 모습은 얼핏 특유의 ‘비누 냄새’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적요에게 누가 선뜻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순진하지 않지만 순수했던 순백의 존재에 대한 열망은 이적요의 상상 속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버리고, 오로지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로 마주하고자 했던 이적요의 마음을 박해일은 절묘히 표현해 냈다.
#5. 그리고, ‘덕혜옹주’의 김장한
박해일은 영화 ‘덕혜옹주’ 속 김장한으로 분하며 조선의 마지막 황녀를 향한 순애보를 펼쳤다. 박해일은 지하실의 차고 습한 공기와 화약 연기가 진동하는 가운데서도 특유의 ‘비누 냄새’를 풍긴다.
김장한은 가혹한 운명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끌어 안고 평생을 버틴다. 처음에는 독립 운동을 하겠다는 신념으로 덕혜(손예진 분)와의 결혼을 거부하지만, 어느새 덕혜가 그의 신념이 되어 있었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각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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