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시네마]‘아가씨’, 예술을 상업으로 바꾼 절묘한 ‘동성애’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06.13 16: 55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난다 긴다 하는 영화감독이라면 예술성이냐, 대중성이냐의 경계에서 고민하기 마련이고, 천박한 관객이라면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구분에 갈등을 개입시키는 성향이 있다.
제작사나 투자사는 어떻게든 관객이 많이 드는 게 첫째 목표인데 감독 역시 흥행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수준 높은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기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제 베테랑이 된 박찬욱 감독은 매우 영특하고 기발하며 묵직한 깊이의 영상언어를 창조해내는 상업적 예술영화의 경지에 올랐음을 ‘아가씨’(CJ엔터테인먼트 배급)를 통해 입증한다.
장편상업영화로선 할리우드의 ‘스토커’ 이후 3년, 한국에선 ‘박쥐’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아가씨’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박찬욱표 상업영화의 집대성’이고 두 마디 째 거론하자면 ‘프랑스와 할리우드에 대항할 수 있는 한국영화의 힘의 대표적인 상징성’이다. 

영국 소설가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3부작인 ‘벨벳 애무하기’ ‘끌림’ ‘핑거스미스’ 중 ‘핑거스미스’를 바탕으로 배경을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조선으로 옮겼다.
막강한 인맥을 바탕으로 값나가는 책을 닥치는 대로 모으고 읽으며 부자들에게 판매하는 것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대저택의 주인 코우즈키(조진웅)는 원래 조선인이었다. 출세욕에 불탄 그는 일본 아내(문소리)를 맞아들여 귀화한 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갑부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아내의 질녀 히데코(김민희)가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자 데려와 키웠고, 아내가 정원의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한 뒤 히데코가 성장하자 부모에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히데코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그녀와 결혼하고자 한다.
대문에서 집의 본채까지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만큼 너른 대지를 자랑하는 코우즈키의 집은 그러나 히데코에겐 막막한 감옥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바깥외출이라곤 해본 적도 없고 심지어 어렸을 때 코우즈키에게 수시로 학대를 당하는 가운데 반항하거나 대꾸하면 지하실에 감금되기도 했다.
이런 대저택에서 코우즈키는 어긋난 욕망을 지적인 유희라고 착각하는 졸부들을 끌어 모아 히데코로 하여금 포르노그라피를 연기를 겸해 낭독하게 하곤 그 책을 비싼 값에 팔고 있다. 그 낭독회에 새로 가입한 백작(하정우)은 사실 백작도 일본인도 아닌 조선의 사기꾼이다.
그 역시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어떻게든 그녀를 자신에게 빠지도록 만들게 함으로써 결혼한 뒤 그녀를 제거해 지긋지긋한 밑바닥 인생을 훌훌 털고자 하는 계획으로 끼어든 것. 그는 자신의 과업을 완수할 파트너로 범행 중 타살된 전설의 여자 소매치기의 외동딸이자 역시 범죄자인 숙희(김태리)를 선택해 그녀를 히데코의 하녀로 위장취업 시키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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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욕을 달고 다니며 조선의 버려진 갓난아이들을 주워와 깨끗이 씻긴 뒤 일본에 팔아넘기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유방에서도 젖이 나와 아이들에게 물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순박한 생각을 가진 숙희는 한없이 순진하면서도 굉장히 폐쇄된 히데코에게 처음엔 압도당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모를 연민을 느끼게 된다.
어릴 때부터 품에 안고 자라온 인형이 지금까지 유일한 친구였던 히데코는 숙희에게 도둑질을 해도 좋으니 딱 한 가지 거짓말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달라고 한 뒤 드디어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히데코를 향한 백작의 작전은 서서히 먹혀들어가고 그렇게 순탄하게 사기가 진행될수록 코우즈키 역시 히데코와 결혼식을 올릴 날짜를 서두른다.
일본과 조선 그 어느 곳에서도 코우즈키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백작은 코우즈키가 출장가면서 집을 비우는 날을 디데이로 정한 뒤 일본의 외딴 절을 결혼식장소로 섭외해놓고 그렇게 그들은 초야를 치른 뒤 정식부부가 된다.
백작은 살짝 미쳐가는 히데코를 아예 정신병원에 감금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의 정신이상을 입증하기 위해 숙희를 이용해 드디어 세 명은 정신병원을 찾는다. 그런데 간호사들이 강제수용하는 사람은 히데코가 아닌, 숙희였다. 백작이 이익금을 그녀에게 나눠주는 게 아까워 배신한 것이다.
영화는 3부작으로 구성돼있다. 1, 2부가 4명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와 서로 속고 속이는 욕망의 소용돌이로 관객들을 집어삼킬 듯한다면 3부는 일탈 혹은 성욕과 성별을 떠난 인간 본연의 순수한 정과 교감을 통해 여성해방을 웅변한다. 마치 강남역 여성 ‘묻지 마’ 살인사건을 예견했다는 듯이. 할리우드 초기 대표적인 반전(reversal) 영화 ‘스팅’의 ‘아이즈 와이드 셧’(스탠리 큐브릭)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죽어가면서도 ‘성기는 지켰다’는 대사 등의 소소한 유머가 곳곳에 포진돼있다. 영화 속 남자들은 ‘감각의 제국’의 무기력한 남자 주인공 기치조 혹은 패전 후 귀환한 일제 패잔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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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과 후속작 ‘3인조’를 연속해서 실패했던 박 감독은 3번째 장편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확실하게 달라졌다. 이때부터 그는 미스터리 스릴러에 탁월한 재주를 발휘하기 시작했고, 미장센에서 단연 경쟁력이 돋보이는 감독의 기질을 뽐내게 됐으며 인간 내부의 억압과 태만, 욕망과 타협, 명분과 인성 사이의 줄다리기 혹은 고뇌에 천착하는 작가주의 정신을 갖추게 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인간의 천박한 우월감과 이기심이 불러올 상상초월의 불행이 어떤 것인지, ‘올드 보이’에서 내가 무심코 던진 돌이 개구리 세계에선 얼마나 큰 재앙이고 무사안일하게 사는 게 왜 인간답게 사는 게 아닌지 보여줬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2005)에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담아 복수를 통한 구원을 얘기하며 ‘킬 빌’(2003)의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김기덕이 불편하고 나홍진이 잔인하다면 박찬욱은 모두 갖췄지만 결코 눈살이 찌푸려진다거나 극도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만약 ‘올드 보이’에서 ‘아버지 오대수와 딸 미도가 그렇고 그렇게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영위했다’는 점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분 더러웠다는 관객이라면 ‘아가씨’에서의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 역시 밥맛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올드 보이’의 오대수는 이우진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앞으로 철저하게 입조심 하겠다며 미도에게 절대 비밀을 지켜달라는 의미로 스스로 혀를 자른다. 만약 대수나 우진이 미도에게 ‘네가 사랑해서 수십 번 같이 잔 남자가 바로 아버지’라고 폭로한다면 두 사람의 불행은 미도에게 대물림되는 것이다. 대수가 아무 말 없이 미도 곁을 떠나도 그녀는 아플 것이다. 그래서 대수는 그 아픔을 오롯이 혼자 간직하려 한 것이다.
‘아가씨’에서 숙희는 히데코에게 계속 감정이 변하고 수시로 갈등하지만 결국 그녀를 사랑하는 본능에 따르기로 순응한다. 그건 히데코 역시 마찬가지다. 숙희가 이질감, 막연한 사회적 복수심리, 천박한 욕심, 동질감, 동병상련, 동정, 우정, 사랑, 욕망 등으로 변해갔다면, 히데코는 경멸, 경외, 동병상련, 구원, 의지(depending)로 열반한다.
숙희는 자신을 압박하는 백작에게 “애기 장난감 같은 X대가리 더 이상 내게 놀리지 마”라고, 히데코는 “여자는 강제로 당하는 것도 즐긴다고 책에 나와 있다”고 외치며 자신을 겁탈하려는 백작에게 “현실세계의 여자는 강제로 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라고 일갈한다. 이는 바로 ‘강남역 살인 사건’처럼 아직도 여성을 동등한 인격이 아닌, 성의 노예로 보거나 혹은 여성의 평등 주장을 남성 폄하로 잘못 받아들이는 남성들이 버젓이 사회를 구성하는 이 아이러니한 혼돈의 세계를 향한 여성 해방의 표제다.
빅토리아 여왕이 다스리던 19세기 영국은 대표적인 선진 산업 자본주의 국가로서 ‘스페인의 깃발이 휘날리는 곳엔 해가 지지 않는다’고 했던 16세기 스페인 제국의 펠리페 2세 시절의 영화를 이어 받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다. 고유의 전통이 정돈되는 동시에 산업혁명으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민주주의가 정착됐다.
하지만 세계 곳곳의 영국 식민지는 자유와 정체성을 박탈당하고 경제를 수탈당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영국 내부에서도 빈부격차가 심해져 뒷골목의 불만이 더 커져갔다. 빛과 어둠, 영광과 착취가 공존하던 이 시대는 ‘아가씨’의 배경과도 닮았다.
가진 자(일본, 혹은 코우즈키)에겐 기회의 시대였지만 없는 자(백작, 숙희)에겐 상실의 시대였고 복수의 지옥도였다. 여기서 대동아공영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히데코(아나키스트, 여성, 타고난 부-여성성-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점에 주목!)에겐 오직 탈출 혹은 자유선언을 통한 구원만이 살 길이었고, 여기에 숙희가 진정한 인생의 품격의 깨달음을 통해 여성해방을 외치는 것이다.
하데코와 숙희의 사랑을 샤를 보들레르나 오스카 와일드가 보여준 불건전한 데카당스의 미적 합리화냐, 질서의 전신마비냐로 볼지의 평가는 두 여자가 코우즈키와 백작이 만든 천박하고 이기적이며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포르노그라피들을 찢고 불태우는 시퀀스로 정리된다.
‘올드 보이’에서 낙지가 변화와 결심 혹은 변신의 의미라면 ‘아가씨’에선 문어가 남성들의 여성을 향한 비뚤어진 이기심과 지배욕구로 등장한다.
박찬욱의 영화는 미장센만큼은 보증수표다. 120억 원을 들였다는 순수제작비는 믿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민희가 비로소 여배우가 됐다에 한 표를 줄지, 김태리라는 새로운 희망의 탄생에 한 표를 줄지는 각자의 몫이다. 당연히 청소년 관람불가다. /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아가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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