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초점]'국수의 신', 쿡방 떨게 만든 안방 누아르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05.13 07: 11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 요즘 보기 드문 드라마 수작이 지금 방송을 타고 있다. ‘태양의 후예’의 바통을 이어받은 KBS2 수목드라마 ‘마스터-국수의 신’(채승대 극본, 김종연 임세준 연출, 이하 ‘국수의 신’)은 박인권 화백의 원작만화를 근거로 한다. 따라서 ‘제빵왕 김탁구’나 ‘식객’이 예상됐지만 5회까지 진행된 내용만 두고 봤을 땐 적수공권의 주인공 무명(천정명)이 어떻게 성장해 거대한 산 같은 철천지원수 김길도(조재현)를 통쾌하게 무너뜨리는지의 긴 여정을 그리는 무협지 구도의 서스펜스 복수극이다.
현재 MBC ‘굿바이 미스터 블랙’과 SBS ‘딴따라’가 근소한 차이로 1위 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꼴찌의 수모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시청률은 별 의미가 없을 듯하다. 안방극장에선 찾아보기 드문 누아르 스타일의 연출로 수준이 다른 프레임을 꾸며가고 있기 때문이다. 뒷심이 크게 발휘될 것을 기대해도 될 듯하다. 
스토리 자체는 별로 복잡할 게 없다. 한번 보면 똑같이 따라하는 재능으로 남의 인생을 훔치며 살던 모든 악의 축 길도가 우연히 만난 하정태의 이름을 갖기 위해 그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과정에서 정태의 어린 아들 순석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보육원에 들어가 무명으로 개명한 채 복수를 꿈꾸며 성장한다는 게 기둥줄거리다.

여기서 그는 채여경(정유미) 박태하(이상엽) 고길용(김재영) 등 동갑내기와 친형제 이상의 우정으로 맺어진다. 세월이 흘러 10대 후반이 된 무명을 알아본 길도가 보육원장을 매수해 그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하는 과정에서 원장이 여경을 강간하려 하고 여경이 방어하다가 그를 죽인다.
이에 태하가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수감되고 그는 무시무시한 조폭으로 변해간다. 그는 면회 온 여경에게 검사가 돼 자신이 경찰이 되고자 했던 이유였던 한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부탁하고 그렇게 여경은 검사가 된다. 여경 역시 어린 시절 눈앞에서 부모가 강도의 칼에 맞아 죽은 상처가 있다.
정체를 숨긴 무명은 길도가 마산에서 시작해 이제 서울 강남에 차린 으리으리한 궁중 국수 전문식당 궁락원에 입성해 길도의 수제자가 되고, 여기서 역시 길도에게 복수의 칼을 가는 동갑내기 김다해(공승연)를 만난다.
길도는 궁락원의 원래 주인인 고대천(최종원)과 마산의 국회의원 최 의원(엄효섭) 덕에 성장할 수 있었다. 아들이 없어 후계자를 고민하던 대천은 궁락권을 물려주기로 한 딸 강숙(이일화)의 제안대로 길도를 사위로 맞아들여 레시피를 전수하고 경영권을 넘겨준 것.
그러나 길도는 강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대천을 뺑소니 사고로 위장해 식물인간으로 만든 뒤 기어이 강남에 입성했고, 그 과정에서 비리 정치인 최 의원을 구워삶아 그를 배경으로 성장한 뒤 정치계에 진출할 야망까지 품고 있다.
여기에 더해 대천의 40년 지기인 절대미각의 음식평론가 설미자(서이숙)가 길도의 아군인지 다해의 우방인지 아리송한 변수로 등장한다.
지금까지 전개된 시퀀스와 이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공개된, 얽히고설킨 플롯은 사실 크게 새로울 것은 없다. 이제 안방극장에서 서스펜스 소재의 장르 드라마는 새로울 게 없기 때문이다. 스릴러 호러 추리물 따위가 드라마의 다변화에 크게 공헌해온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국수의 신’은 또 다르다. 거의 모든 드라마가 작가의 구성과 필력에 의해 시청자에게 어필하려 하는 데 반해 이 드라마는 연출 혹은 후반작업에 강점이 크다.
지금까지의 화면을 보면 배경 시간대가 주로 밤이고 낮일지라도 화면은 대부분 어둡다. 팀 버튼이 ‘배트맨’을 연출할 때 일부러 매 시퀀스에서 고담시를 어둡게 표현한 것이 연상될 정도다.
그림이 칙칙하다고 분위기까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저마다의 비밀 혹은 차마 털어놓기 힘든 사연을 지녔고, 그것을 각 배우들이 적당하게 내면에 가둔 얼굴 뒤의 그림자로 표현할 줄 아는 탄탄한 연기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폐지 손수레를 끌며 사는 할머니에게 몰래 스웨터와 용돈을 건넨 뒤 숨어서 우는 김재영만 제외하곤 세 명의 젊은 주인공들의 연기는 썩 훌륭하다. 당연히 이 드라마의 중심축을 이루는 조재현의 거론의 여지가 없는 절정의 연기력과 더불어 그와 조화를 이루는 서이숙의 묵직한 존재감에 비교해 밀리지 않는 균형감각을 이룬다.
37살의 천정명, 34살의 이상엽, 33살의 정유미, 29살의 김재영 등이 고등학생이라는 게 많이 어색하고 특히 천정명이 튀긴 하지만 영화 ‘친구’에서 선생 역을 맡은 김광규보다 고작 1살 어린 유오성이 까까머리 고교생 역을 맡은 것을 대입하면 무리는 아니다.
특히 이 드라마를 완성하는 화룡점정은 백그라운드뮤직(BGM)이다. 주축악기는 바이올린을 선두로 한 스트링을 비롯해 피아노, 일렉트릭 기타다. 보통 바이올린은 ‘선율’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우아한 분위기고 비올라나 첼로는 장중함을 연출한다. 피아노는 점잖으면서도 대중적으로 통통 튀는 이미지가 강하고, 일렉트릭 기타는 날카로운 면이 앞선다.
그러나 이 드라마 속의 모든 악기들은 처절하고 비장하며 한이 서려있다. 각 캐릭터들의 긴장과 갈등 그리고 고뇌의 장면에선, 특히 길도의 원 신에선 현악 3~4중주가 듣는 이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불협화음을 연주한다. 복잡다단한 감정의 마찰 혹은 질곡을 표현한다.
피아노의 건반을 중간에서 둘로 나눈다면 오른쪽은 상큼하거나 서글프다. 여기서는 후자다. 음악의 기초를 이루는 악기인지라 모든 장르를 표현할 수 있지만 처연한 빗소리 아래 인간의 서글프고 절박한 감정을 이토록 간절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기능을 지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만든다.
일렉트릭 기타는 록의 바이블이자 묵시록이다. 그런데 여기선 비장미의 레퀴엠이라는 검은 장막으로 치장된다.
이제는 여유 있는 제작기간을 제외하곤 굳이 영화 시스템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영화에 비해 열악한 환경이 남아있는 것은 맞지만 이 정도의 연출력과 후반작업을 통해 연출의 의도를 충분히 살릴 수 있다면 한국의 드라마의 앞날은 밝다.
‘발이 없어 평생 날아야만 했던’ 아비(장궈룽, 장국영)의 외로웠던 짦은 삶을 다룬 영화 ‘아비정전’ 역시 시종일관 어둡다. 아비는 저 유명한 로스 인디오스 타바하라스의 ‘Maria Elena’를 배경으로 맘보춤을 춘다. 그런데 이 장면은 흥겹지 않고 더 슬프다. ‘국수의 신’의 BGM이 그렇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KBS 제공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