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레터]‘계춘할망’ 윤여정에 의한, 김고은을 위한 최루탄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05.03 08: 02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만약 영화 ‘계춘할망’(창 감독)이 TV 드라마였다면 무조건 망한다. 왜냐면 러닝타임 116분을 1, 2부로 나눴을 때 1부가 지루하고, 시퀀스와 캐릭터가 개연성이 떨어져 스토리 안에 쉽게 녹아들어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나타운’을 계기로 괄목상대할 만큼 성장한 김고은의 연기력이 요즘 물이 오를 대로 오른 그녀의 아름다음과 어우러져 지금까지 국내 영화계에서 보기 드물었던 유니크한 개성과 매력을 지닌 대단한 여배우의 탄생을 기대하게 만들 따름이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면 산전수전 다 겪은 윤여정이 타이틀롤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약서를 덥석 물었을 리 없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정말 대단한 스토리와 메시지와 감동으로 깊은 울림과 진한 여운을 남긴다. ‘집으로’보다 수준이 높고, ‘로봇, 소리’보다 훨씬 탄탄한 플롯이다.
제주도에서 남편을 여의고 해녀로 사는 계춘(윤여정)에게 유일한 가족은 이혼한 뒤 요절한 외아들의 7살 외동딸 혜지(김고은)다. 계춘에게 손녀 혜지는 그야말로 금지옥엽이다. 그녀의 삶의 전부다 못해 내세에도 잊지 못할 진정한 재산목록 1호다.

영화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사소하지만 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만드는 계춘과 혜지의 알콩달콩한 삶 속으로 들어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진다.
그러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어느 날 두 사람이 시내의 복잡한 재래시장에 나갔을 때다. 경황 중에 계춘은 그만 혜지의 손을 놓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생이별을 한다.
그로부터 12년 후 서울. 혜지는 민희(박민지)와 거리의 부랑아로 산다. 철헌(류준열) 등 또래의 두 불량청소년들과 힘을 합쳐 원조교제를 빌미로 유인한 유부남의 사진을 찍은 뒤 이를 가정에 알리겠다고 협박해 돈을 빼앗아 근근이 살아간다.
그날도 그런 일에 혜지가 동원됐지만 철헌과 친구가 범행대상을 심하게 폭행하는 바람에 과다출혈로 피해자가 기절하고 이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렇게 계단 밑에 쭈그려 앉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혜지에게 민희가 다가와 빵과 우유를 건넨다. 그만큼 그들은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가족이다.
그런데 민희가 우유 팩을 가리키며 실종아동찾기 광고에 혜지와 동명이인이 있다고 보여준다. 계춘이 낸 광고였다.
그렇게 혜지는 제주도로 돌아온다. 12년 전 혜지는 공무원의 도움으로 재혼한 생모의 집으로 넘겨졌고, 생모는 할머니에게 돌아가겠다는 딸에게 할머니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집에 가뒀지만 얼마 안 가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렇게 혜지는 거리의 아이가 된 것이었다.
곧 죽을 것만 같았던 계춘은 새로운 생명을 얻은 기분으로 열과 성을 다해 혜지를 돌보고 아직 19살인 그녀를 고등학교에 보낸다. 어릴 때부터 혜지의 미술솜씨가 탁월했던 것을 또렷이 기억하는 계춘은 미술선생 충섭(양익준)에게 인삼주 등 각종 ‘뇌물’공세를 펼치며 특별지도를 부탁한다.
하지만 웬일인지 혜지는 정든 고향과 유일한 피붙이인 계춘에게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겉돈다. 그런 그녀 앞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한이(최민호 분)가 나타나 호의를 보이며 이모저모로 돕고자 애를 쓴다.
민희가 걱정되는 혜지는 공중전화로 민희와 통화를 하다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된다. 피해자가 깨어났는데 워낙 중상이어서 경찰에 신고했고, 철헌 일행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피해자는 합의금으로 큰돈을 요구하고 있고, 혜지는 사기 협박 폭행 등 모든 혐의를 뒤집어쓰게 될 위기다. 이에 철헌은 혜지에게 계춘에게서 돈을 훔쳐 합의금을 마련하라고 협박한다.
이 사이 마을사람들은 계춘에게 몰려와 혜지가 담배를 피우고 복장이 불량스러운 ‘날라리’라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항의하지만 계춘은 마냥 손녀를 감쌀 따름이다. 바닷가에 홀로 앉아 깊은 상념 혹은 혼란스러운 고민에 휩싸여 담배를 피우는 혜지 옆에 계춘이 슬그머니 다가와 앉는다. 깜짝 놀란 혜지에게 계춘은 천연덕스럽게 “나도 한 대”라고 요구한 뒤 같이 피우며 어릴 때 해줬던 얘기를 되풀이한다.
계춘은 어린 혜지에게 “바다가 크니, 하늘이 크니?”라고 물었고, 쉽게 대답을 못하는 손녀에게 “바다가 크다”고 의미심장한 가르침을 준 적이 있다. 똑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혜지에게선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하늘”이란 답이 나온다. 거친 삶에 찌들었던 것이다. 계춘의 표정은 알 듯 모를 듯, 마치 부처 같다.
혜지의 심상치 않은 미술 실력을 알아본 충섭은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에 그녀를 데리고 참가한다. 그러나 혜지는 충섭 몰래 의붓아버지를 만나 훔쳐온 계춘의 예금통장을 건넨 뒤 충섭에겐 죄송하단 쪽지와 그림 한 장만 남긴 채 잠적한다.
이제부터 이 영화는 관객을 울리기 시작한다. 뒤통수를 때릴 반전도 존재한다. 그리곤 또 다시 아예 관객 몸속의 수분을 눈물 콧물로 모두 빼겠다고 작정한 듯 영혼의 내면을 감정의 사금파리로 후벼 판다.
계춘은 전형적인 우리네 부모의 초상이다. 오직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고 그걸 위해선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며 그걸 행복으로 여기는. 여기까진 ‘집으로’다. 만약 영화가 줄곧 이런 주제로 밀고 나갔다면 지루했던 앞의 절반이 후반부의 클리셰의 평면적 공간배치로 인해 결국 관객의 하품 혹은 부아를 이끌어내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혜지는 산산조각 난 우리의 가정의 현주소며, 가진 자들의 과욕의 부산물인 가난과 소외를 먹고 사는 소시민들의 고통의 발현인 동시에 그런 과정에서 부모의 피는 물론 가난과 불행의 DNA마저 물려받아 더 처참한 삶을 사는 요즘 젊은이 혹은 청소년의 벌거벗은 증명사진이다.
모두 혜지를 안 믿고 의심할 때 계춘은 말한다. “내가 네 편이 돼줄게. 너는 네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지금 10~30대 젊은이들 중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거나 여유롭게 사는 이가 도대체 얼마나 될까? 그건 그들에게 ‘같은 편’이 없기 때문이다. 소수의 ‘가진’ 어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식에게만 아낌없이 돈을 쓸 줄 알지, 자신의 부정축재로 인해 가난한 이웃이 헐벗고 굶주려 고통 받고 있으며, 그게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싶지도 않지만 알면서도 굳이 아는 척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가장 굳은 신념과 의지를 갖고 주장하는 것은 믿음이다. 굳이 옥시 사태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나라는 불신이 넘쳐나는 혼돈의 세상이다.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는 부모가 있는 가정이라면 유산상속 다툼이 흔한 얘기가 됐고, 대다수 정치인과 재벌은 국민을 기만하고 기망하는 것을 밥 먹듯 하는 게 현실이다.
그 속에서 가난하지만 혜지가 있어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풍요로운 계춘은 가장 배부른 천사고, 그런 계춘에게 동화될 수 없는 혜지는 타락천사 루시퍼다. 루시퍼는 창조자를 뛰어넘으려다 지옥으로 떨어지고 혜지는 기성세대에 반발해 독립하려하지만 더욱 나락으로 떨어진다.
애초 루시퍼가 맡았던 대천사의 자리에 가브리엘이 오르지만 혜지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대천사의 자리가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음을 입증한다. 계춘의 용서와 혜지의 일탈은 피아의 일체고, 보수와 진보의 악수며, 탈이념 탈세대 탈계층의 대주우적 화합을 의미한다. 스포일러이기에 쓸 수 없지만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는 상영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실 것이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의 정서적 매개는 그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그림과 음악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감독은 그동안 뮤직비디오 연출자로서 화려한 이력을 자랑해왔지만 영화 연출에서는 자신의 모든 팬들을 실망시켰다고 해도 항변하지 못할 성적표를 받았다. 그런데 이번은 다르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그림’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그는 동심을 담은 그림이 그 어떤 유명 화가의 그림보다 진한 내면의 고백을 표현해낼 수 있는지, 그래서 그게 보는 사람들을 얼마나 가슴 절절하게 감동시킬 수 있는지 아주 훌륭하게 ‘그리고’ 있다.
윤여정은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대표작을 만났고, 김고은은 비교적 빨리 수작을 만났다. 특히 김고은에게 이 영화는 배우로서의 결정적인 터닝포인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준열과 최민호의 팬들은 실망할 것이다. 그들의 비중도 적고, 매력도 덜 빛난다. 멜로? 없다. 15세 이상 관람 가 등급판정은 매우 당황스럽다. 그래서 혜지가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현실이다. 19일 개봉./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사진> '계춘할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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