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톡톡]비틀즈란 그룹이 대중음악에서 갖는 의미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03.14 09: 13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이제 국내에서도 비틀즈의 음악의 스트리밍 및 다운로드 서비스가 가능하다. 비틀즈는 전 세계 팝 음악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0순위 뮤지션임에 틀림없다. 왜 그들은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어째서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뮤지션으로 남아있는 것일까?
‘빌보드 차트 1위에 어쩌고’ ‘앨범을 얼마나 팔아치우고’ 등의 수사는 비틀즈라는 거대한 뮤지션을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천박하기에 생략한다.
그냥 전 세계 뮤지션은 물론 오케스트라까지 가장 많이 리바이벌하거나 무대에서 연주하는 곡이 ‘Yesterday’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비틀즈에 대한 짧은 설명이 충분하다. 그들의 음악은 트렌드였고, 그들은 시대의 아이콘이었으며, 미국의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항한 영국의 최초의 오빠부대 생산자였을 뿐만 아니라, 록이라는 가장 중요한 대중음악의 완성자였다.

비틀즈는 아이돌그룹-과도기-뮤지션의 3대 변화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 그들은 아이돌그룹이었다. 영국 리버풀 출신의 10대 소년 존 레넌과 2살 어린 폴 매카트니가 만나 쿼리맨이란 스키플 밴드를 결성한 그들은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개러지밴드에 불과했다. 특히 스키플이란 음악 자체가 비주류인데다 시카고에서 유치하게 시작돼 영국에서조차 허접한 내용으로 펼쳐진 10대들의 장난 수준의 음악이었으니 쿼리맨의 음악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었다. 이들은 매카트니보다 1살 어린 조지 해리슨을 1958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밴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당시 레넌과 매카트니의 기타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해리슨은 이미 탁월한 실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독일 등의 순회공연을 통해 스키플밴드에서 로큰롤밴드로 서서히 탈바꿈하게 되는데 누가 뭐래도 전 멤버들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향을 받았음은 확연하다. 그리고 1962년 그들보다 더 유명했던 드러머 링고 스타(레넌과 동갑)를 영입해 실버 비틀즈란 이름을 버리고 비로소 비틀즈란 이름을 굳히며 본격적적인 활동을 펼치게 된다. 
레넌보다 5살 위인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시시피에서 태어나 멤피스로 이사 간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보듯 철저하게 블루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거의 흑인이었다. 하지만 백인이기에 컨트리앤웨스턴을 자주 접한 환경에서 자랐고, 그래서 그는 컨트리앤웨스턴 넘버들을 리듬앤블루스의 창법으로 부르는 차별화된 개성으로 로큰롤의 ‘왕’이 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비틀즈의 음악 속에는 블루스적 요소가 거의 없다. 그 배경은 아마도 팝의 기초가 된 유럽의 클래식의 중심이 영국이라는 자존심이 작용했기 때문일 수 있다. 단, 레넌이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비행청소년이었고, 매카트니가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뮤지션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에서 대조적인 두 영국의 청소년이 각자가 가진 각기 다른 감수성을 잘 융합했다는 점에선 독창성을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1964년 미국에 첫걸음을 내디딜 때만 해도 그들의 음악은 프리틴송(10대 초반을 겨냥한 말랑말랑한 사랑 노래)이었다. 즉 그들은 아이돌그룹이었다. 미국 청소년들은 이 이국적인 더벅머리 청년들에게 열광했고 순식간에 전 세계에 비틀즈 신드롬이 광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비틀즈 모즈라고 해서 그들의 패션과 헤어스타일은 패션의 아이콘이 됐다.
미국을 강타한 ‘I wanna hold your hand’ 같은 프리틴송이나 부르던 비틀즈는 미국에서의 성공을 기점으로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가사에 사회적 메시지와 우주적 세계관을 담았고, 음악은 드럼과 퍼커션을 다소 둔화시키는 대신 기타를 한층 강화한 백그라운드를 꾸몄다. 그 사이 매카트니의 베이스기타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해리슨의 기타는 물이 오를 대로 올랐고, 후에 인도의 시타까지 연주하면서 더욱 강하고 독창적이며 심오해졌다.
그리고 1967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을 계기로 비틀즈는 아티스트가 된다. 이후 공식적으로 마지막 앨범이 된 ’Beatles‘(일명 ’White album‘)로 이어지는 이 앨범의 ’컨셉트 앨범‘ 형식은 훗날 록의 모든 하위장르의 모델을 제시하고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한 장의 음반이 하나의 주제로 이어진 ’작품‘이라는 첫 시도로써 모든 록뮤지션들을 계몽시킨다. 특히 ’비틀즈‘ 앨범은 더블앨범이라는 시도로 록을 대중가요가 아닌 클래식의 영역으로 격상시킨다.
음악적으로 중기보다 훨씬 더 심오한 가사와 풍부한 음악성을 갖춘 것은 당연하지만 뭣보다 두드러지는 점은 스튜디오 녹음의 기술상의 진일보다.
1960년대 중반을 계기로 각종 전자악기부터 이펙터 녹음기술 등의 비약적인 발전은 스튜디오에서의 녹음을 혁신했으며 이에 따라 크리에이터가 원하는 거의 모든 창작과 개혁 그리고 파격적인 시도가 가능해진 것이고, 이 네 명의 진보적인 뮤지션들은 자신들의 예술적 감각을 모두 녹여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록 역사상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세션에 동원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효시가 바로 비틀즈라는 점이다.
오늘날 대중음악의 기본은 록이다. K팝도 마찬가지다. 록은 로큰롤에서 발달했고, 로큰롤은 리듬앤블루스와 컨트리앤웨스턴의 결합에 재즈를 촉매제로 해서 탄생됐다. 결국 17세기부터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온 서아프리카의 흑인들이 200년간 발전시킨 블루스가 록의 뿌리가 되는 셈인데 미국과 멀리 떨어진 영국의 20대 청년들이 거꾸로 록으로 미국을 점령한 것이다.
이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비틀즈를 필두로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 수많은 록뮤지션들로 이어졌다. 록 역사상 3대 기타리스트로 손꼽히는 지미 헨드릭스 역시 흑인 로커란 이유로 미국에서 무시당할 때 영국에서 먼저 알아보고 무대에 세웠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나머지 두 명인 에릭 클랩턴과 제프 벡도, 헨드릭스가 요절한 후 그 빈 자리에 자연스럽게 추대된 지미 페이지도 모두 영국인이다.
아이돌그룹의 효시, 영국 록의 미국 침공의 선두주자라는 자존심, 록의 모든 장르와 컨셉트 앨범의 창조자, 스튜디오 녹음 발전의 모델, 그리고 스타일의 리더가 바로 비틀즈의 의미다.
 
유진모 ybacchus@naver.com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