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재의 하이브리드앵글] 전희숙,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
OSEN 이균재 기자
발행 2014.09.22 06: 29

꽃처럼 사람도 피어나는 시기가 다르다. '파워검객' 전희숙(30, 한국체대)이 '만년 2인자'의 설움을 딛고 숙원을 이뤘다. 메이저대회 개인전 정상에 우뚝 섰다. 때를 기다렸다 핀 꽃이었기에 더 아름다웠고, 진한 향기를 풍겼다.
세계랭킹 8위 전희숙은 지난 21일 고양실내체육관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 펜싱 여자 플뢰레 결승서 중국의 러후이린(세계 11위)을 15-6으로 가볍게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을 통틀어 본인의 메이저대회 첫 개인전 우승이었다.
2006 도하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개인전 동메달, 2012 런던올림픽 단체전서 동메달을 따냈던 전희숙은 과거도 현재도 여자 플뢰레를 대표하는 스타다. 하지만 전희숙이라는 이름은 대중들에게 익숙치 않다. '1인자' 남현희(33, 성남시청, 세계 14위)의 빛에 가린 탓이다. 전희숙 보다 3살이 많은 남현희는 도하에서 일찌감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개인전과 단체전을 제패하며 2관왕에 올랐다. 2008 베이징올림픽은 남현희의 이름 석자를 각인시켜준 무대였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 세계 펜싱과 당당히 맞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미녀검객', '땅콩검객' 등 남현희를 일컫는 별명도 이 때 생겨났다. 남현희는 광저우서도 2관왕을 차지하며 여제의 자리를 지켰다.

전희숙에겐 환희와 절망이 교차한 시간이었다. 남현희와 함께 단체전 금메달을 합작했던 도하에서 쟁쟁한 선배들에 밀려 개인전에 나서지 못했다. 2년 뒤 베이징올림픽은 TV로 지켜봐야 했다. 단체전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광저우서도 개인전 준결승서 쓰라린 패배를 맛봤다. 남현희에게 14-15로 분패,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런던서도 단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개인전에서 일찌감치 짐을 쌌다.
절치부심, 안방에서 열린 전희숙의 마지막 아시안게임. 개인전 준결승서 얄궂은 운명과 맞이했다. 공교롭게도 남현희와 다시 만났다. 무대만 바뀌었을 뿐 묘하게도 4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전희숙은 1라운드 초반 남현희의 빠른 발에 고전했다.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른 뒤 남현희를 차근차근 공략했다. 절대 급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뒤지고 있었지만 스텝과 손동작엔 자신감이 넘쳤다. 전희숙은 결국 15-7로 대역전승을 거두며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도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전희숙은 경기 초반 6-3으로 앞서다가 발목을 살짝 삐긋한 뒤 6-5까지 따라잡혔다. 추격 허용은 거기까지였다. 1점을 내주는 동안 무려 9점을 뽑아냈다. 압도적이었다. 준결승과 결승서 내준 점수는 도합 13점에 불과했다. 피스트에 새로운 여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전희숙은 그럼에도 "금메달을 딸 줄은 몰랐다. 최선을 다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겸손의 미덕을 보였다.
고질적인 부상을 이겨낸 값진 결실이기도 했다. 전희숙은 오래 전부터 허리와 무릎에 디스크를 안고 있다. 지난해 가벼운 수술을 한 뒤 약으로 버텼다. 큰 수술을 받고 싶어도 아시안게임 때문에 쉽사리 수술대에 오르지 못했다. 또 다른 장애물도 있었다. 철분제를 섭취하며 빈혈을 이겨냈다. 부족한 체력은 지옥같은 훈련으로 끌어 올렸다. 나아진 체력은 금메달의 숨은 원천이었다.
뛰어난 기량 만큼 효심도 깊다. 전희숙의 아버지는 지난 2008년 여생을 마감했다.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던 해였다. 아버지는 숙원이었던 딸의 올림픽 출전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런던올림픽 출전을 확정짓고 더 기뻐했던 이유도 고인이 된 아버지의 못다 이룬 소원을 뒤늦게나마 이뤄드렸기 때문이었다. 전희숙은 이날 금메달을 따낸 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리겠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지극한 효심을 보였다.
전희숙의 시선은 이제 단체전을 향한다. 남현희를 비롯해 오하나(29, 성남시청), 김미나(27, 인천중구청)와 함께 피스트에 올라 2관왕을 겨눈다. 늦게 펴서 더 아름다운 전희숙. 진한 향기로 다시 한 번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OSEN 이균재 기자 dolyng@osen.co.kr
고양=이대선 기자 sunda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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