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호-지성②] 가슴에 태극기 품은 글로벌 슈퍼스타
OSEN 서정환 기자
발행 2014.07.25 06: 41

‘우리나라는 박찬호가 선발투수로 나온다!’, ‘이번 월드컵도 박지성만 믿어!’
한 때 우리나라 스포츠팬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지만,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아쉬운 말이다. 한국 스포츠계의 ‘거성’ 박찬호(41)와 박지성(33)이 나란히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지난 18일 광주 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14 한국야쿠르트 세븐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시구자로 나서 선수생활의 끝을 다시 고했다. ‘산소 탱크’ 박지성은 2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지는 ‘하나은행 K리그 올스타 with 팀 박지성’ 경기에서 현역생활을 마무리한다. 과연 두 슈퍼스타는 현역시절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을까.

  
▲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올스타
1994년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에 데뷔한 박찬호는 1996년 4월 7일(이하 한국시간) 리글리 필드에서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첫 승을 거뒀다. 그리고 처음 풀타임 선발투수가 된 1997년부터 FA 자격 취득 직전인 2001년까지 박찬호는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뒀다. 특히 2000년에는 18승 10패, 평균자책점 3.27로 맹활약을 펼쳤다. 한국인 최초 올스타선수 선발도 박찬호의 업적 중 하나였다. 당시만 해도 박찬호의 통산 200승 돌파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박찬호는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LA를 대표하는 스포츠스타로 유명세를 떨쳤다.
이후 박찬호는 텍사스 레인저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마이너), 다시 다저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거치며 통산 124승을 수확했다. 이는 아직도 아시아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기록한 최다 승수로 남아 있다. 특히 박찬호의 기록은 ‘약물의 시대’를 관통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 있게 평가받고 있다. IMF로 온 나라가 고통을 받았던 시절. 박찬호의 강속구에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이 헛방망이질을 할 때마다 국민 모두가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었다.
박찬호는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도 수차례 호투하며 세계 속에서 한국야구의 위상을 높였다. 1998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4강은 박찬호의 공이 없이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2006 WBC에서는 1라운드 일본전 마무리, 2라운드 일본전 선발로 팀 승리를 이끌며 자존심을 세웠다.
빅리거로서 자신의 거취가 불안정했던 2007년에도 박찬호는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 참가했다. 또한 2009 WBC를 앞두고 국가대표 은퇴를 결정하면서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방콕 아시안게임 때를 제외하면 전성기에 태극마크를 달지는 못했지만, 박찬호는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을 때는 항상 최상의 피칭을 보였다.
▲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한국대표팀의 ‘심장’
박찬호가 다저스에서 뛰었다면, 박지성은 맨유에서 뛰었다. 웨인 루니(30),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9), 루드 반 니스텔루이, 반 데 사르, 리도 퍼디난드 등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세계적인 선수들이다. 이들은 곧 박지성의 절친한 동료들이기도 했다. 더구나 박지성의 스승은 전설의 명장 알렉스 퍼거슨이었다. 세계최고의 클럽에서 한국 선수가 주력으로 뛴다는 것.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상황이었다.
맨유에서의 7시즌 동안 박지성은 총 205경기에 나서 27골을 넣었다. 박지성은 측면공격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등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알렉스 퍼거슨 경이 원하는 역할을 항상 100% 소화해냈다. 특히 상대편 에이스를 꽁꽁 묶는 수비력과 체력은 세계최고수준을 자랑했다. 2009-2010시즌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AC 밀란의 플레이메이커 안드레아 피를로를 꽁꽁 묶는 박지성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냈다. 피를로는 박지성에게 ‘감시견’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프리미어리그 우승 4회(2007, 2008, 2009, 2011), 리그컵 우승 3회(2006, 2009, 2011), 커뮤니티실드 우승 2회(2010, 2011),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2008), 클럽월드컵 우승 1회(2008)의 대기록을 남겼다. 2008년 챔피언스리그서 준결승까지 맹활약했던 박지성은 끝내 결승전에 뛰지 못했다. 맨유의 우승에도 불구 박지성이 웃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당시 결승에서 박지성을 제외했던 퍼거슨 감독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며 박지성에게 미안함을 내비추기도 했다.
국가대표팀에서 박지성은 ‘캡틴’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팀의 막내로 포르투갈전 결승골을 터트려 사상 첫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2006년에는 팀의 에이스로 프랑스전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다. 2010년 박지성은 그리스전 결승골을 터트려 한국의 원정 16강 진출에 발판이 됐다. 박지성은 3개 월드컵 연속골이라는 한국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은 네덜란드에게 0-5로 참패를 당했다. 태극전사들은 데니스 베르캄프 등 세계적 선수들의 이름값에 맞붙기도 전에 기세가 눌렸다. 그런데 2006년 프랑스전에서 박지성은 절친 파트리스 에브라와 장난을 쳤다. 2010년 아르헨티나전에서는 역시 친구인 카를로스 테베즈와 인사를 했다. 상대팀 역시 박지성의 존재만으로 부담을 느꼈다. 박지성으로 인해 격상된 한국축구의 위엄이었다. 박지성은 그런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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