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호-지성①] 외로운 개척자, '빅리그 문' 활짝 열다
OSEN 서정환 기자
발행 2014.07.25 06: 40

한국 스포츠계의 ‘거성’ 박찬호(41)와 박지성(33)이 나란히 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지난 18일 광주 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14 한국야쿠르트 세븐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시구자로 나서 선수생활의 끝을 다시 고했다. ‘산소 탱크’ 박지성은 2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지는 ‘하나은행 K리그 올스타 with 팀 박지성’ 경기에서 현역생활을 마무리한다. 두 슈퍼스타는 한국 스포츠계에 길이 남을 큰 족적을 남겼다.
  

▲ 메이저리그의 개척자, 박찬호
박찬호는 국내 야구에 있어 개척자적인 존재였다. 우선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가 박찬호다. 단순히 진출만 한 것이 아니라 1994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에 머물며 메이저리그에서만 통산 124승을 올렸다. IMF로 국가가 힘들 때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것만으로도 박찬호는 124승이라는 수치 이상으로 큰 존재였다.
메이저리그에서 보여준 박찬호의 활약은 후배 선수들이 빅리그에 진출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을 거둔 뒤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 김선우, 봉중근 등이 메이저리그에서 자취를 남겼고, 지금도 많은 고교 유망주들이 미국을 향하고 있다. 박찬호의 활약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부분이다.
김병현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의 성공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메이저리그가 한국야구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은 박찬호의 영향이 가장 크다. 지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메이저리그 팀들이 한국 선수들을 스카우트 하는데 관심이 많다. 그들이 찾는 것은 ‘제2의 박찬호’일 것이다.
▲ 한국인 최초 프리미어리거, 박지성
박지성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1980년대 한국축구는 불세출의 슈퍼스타 차범근(61)을 배출했다. 독일 분데스리가를 평정한 차범근은 한국 선수가 축구로 세계를 평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했다. 하지만 1990년대 차범근의 대를 이을 선수는 나오지 않았다. 기량이 뛰어난 국가대표 선수들도 유럽무대 진출이 쉽지 않았다. ‘한국 선수는 안 돼’라는 편견을 깨줄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만 해도 국가대표 멤버 중 유럽해외파는 서정원(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노정윤(네덜란드 NAC브레다) 단 두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선입견을 깨고 세계무대로 날아오른 선수가 바로 박지성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한 박지성은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함께 네덜란드리그 명문클럽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한다. 초반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홈팬들까지 박지성에게 인종차별적인 야유를 보낼 정도였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이 수술을 받았을 때 한국이나 일본으로 돌려보내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본인이 팀을 위해 헌신하고 참으려는 의지가 강했다”고 회고했다.
자신감을 얻은 박지성은 ‘위숭빠레’ 응원가가 생길정도로 네덜란드에서 유명한 선수가 됐다. 특히 2004-2005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터트린 골은 박지성이 잉글랜드 최고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로 이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만 해도 박지성이 맨유에 가서 주전으로 뛸 수나 있겠냐는 비관론도 많았다.
박지성은 보란 듯이 무려 7년 동안 맨유의 주력선수로 맹활약했다. 1호 선수 박지성의 대성공 후 이영표, 설기현, 김두현, 이동국 등 많은 선수들이 프리미어리그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만약 박지성이 실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의 박주영, 기성용, 손흥민 등이 해외무대서 활약할 기회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박찬호와 박지성 모두 척박한 환경에서 큰 결실을 맺은 선구자이자 개척자였다.    
jasonseo34@osen.co.kr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