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스포츠는 승부의 세계다. 건전한 신체를 단련해 건강한 삶을 누린다는 이상은 허구의 절대 선쯤으로 도외시된 지 오래다. 특히, 프로 스포츠는 더하다. 우승자가 독식하는 약육강식의 철칙만이 존재한다.
이 맥락에서, 스포츠와 전쟁은 일맥이 통한다. “그라운드 또는 코트는 전장의 압축판이다.”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 스포츠 전문가들이 부지기수일 정도다. 그만큼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마당이 스포츠 세계다.
스포츠에서, 감독은 장수로 비견된다. 그런데 승패에 연연한 구단의 칼바람 앞에서, 감독은 곧잘 희생양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시즌 중에도 감독 교체의 극약 처방전을 꺼내 드는 구단이 적지 않다. 절대 왕정 시절에도 군주는 “물을 건널 때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라며 웬만하면 전쟁 중에 장수를 교체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 말이 무색해질 만치 시즌 중에도 사령탑 교체가 흔하디흔한 모양으로 빚어지곤 한다.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각축전이 펼쳐지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를 보면 ‘감독 무상’의 느낌이 더욱 짙게 든다. “감독, 곧 바람 앞의 등불이다.” 이런 표현이 낯설지 않게 자주 오르내리는 격전장이 EPL이다. 반등을 노리는 구단은 시즌 중 감독 교체라는 충격요법을 단행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주, 전통 명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극약 처방’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아직 시즌의 ⅓을 소화하지 않았는데도, 에릭 텐 하흐 감독(54)을 중도 퇴진시키는 칼바람을 일으키는 데 서슴지 않았다. EPL 2024-2025시즌 중 첫 번째 희생양의 운명에 맞닥뜨린 텐 하흐 감독이다. 2022-2023 EFL컵과 2023-2024 FA컵 우승의 영광을 뒤로하고 쓸쓸히 역사의 한쪽으로 비켜서야 했다.
EPL에서, 오래도록 사령탑을 지킨다는 사실은 이제 ‘희소가치’가 됐다. 이번 시즌 EPL 20개 클럽 가운데, 5년 이상 같은 팀 사령탑에 앉아 있는 감독은 두 사람뿐이다. 펩 과르디올라 맨체스터 시티 감독(53)과 토마스 프랑크 브렌트퍼드 감독(51)이 그 주인공이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2016년 7월부터 8년 4개월간, 프랑크 감독은 2018년 10월부터 6년 1개월간 각각 ‘The Sky Blues(맨체스터 시티 별칭)’와 ‘The Bees(브렌트퍼드 별칭)’을 이끌고 있다.
한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려면 최소한 1년 이상 열정을 불태우며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 좋은 예가 세계적 명장인 위르겐 클로프 리버풀 전 감독(57)이다. EPL에서, 클로프 전 감독이 명성에 걸맞게 자신의 색깔을 내고 업적을 내는 데엔 다섯 시즌이 필요했다. 2014-2015시즌 6위였던 리버풀은 클로프 체제 1막인 2015-2016시즌 오히려 8위로 추락했다. 두 시즌(2016-2017~2017-2018) 연속 4위와 2018-2019시즌 2위를 거쳐 비로소 5막인 2019-2020시즌에서야 비로소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아스널과 맨체스너 유나이티드, 벵거와 퍼거슨 장기 집권에 힙입어 1·2위에 올라
그렇다면 EPL에서, 어느 클럽이 감독에 대해 가장 애정을 갖고 충성도를 보일까? 반대로, 어느 구단이 가차 없이 교체 칼날을 휘두를까? 이 맥락에서, 트랜스퍼마크트가 분석해 자신의 누리집에 올린 글은 충분히 눈길을 끌 만하다. 트랜스퍼마크트는 12시즌 이상 EPL에서 모습을 나타낸 팀을 대상으로 사령탑에 앉았던 감독의 수를 집계해 그 결과를 내놓았다.
감독에 대해 으뜸의 충성도를 보인 클럽은 아스널이었다. EPL이 출범한 1992-1993시즌부터 지금까지 33시즌 동안, 아스널은 4번밖에 사령탑을 바꾸지 않았다. 곧, 5명이 평균 6,6시즌씩 사령탑을 지휘했다(표 참조).
그 바탕엔, 아르센 벵거 전 감독(75)이 자리하고 있다. 1996년 10월 1일부터 2018년 6월 30일까지 21년 9개월간 장기 집권한 벵거 전 감독에 힘입어, 아스널은 최고의 충성도를 지닌 팀 영예를 안았다. 이 기간에, 아스널을 22시즌 지휘한 벵거 감독은 EPL 3회(1997-1998, 2001-2002, 2003-2004시즌) 우승의 결실을 올리며 명장으로 자리매김했다.
2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역시 33시즌 동안 사령탑을 지킨 감독은 6명으로, 평균 5.5시즌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같은 6명을 보인 미들즈브러와 볼턴 원더러스를 EPL에서 활동한 시즌 수에서 앞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아스널에 벵거 전 감독이 있었다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엔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82)이 존재했다. 퍼거슨 전 감독은 EPL로 옷을 갈아입은 1992-1993시즌부터 2012-2013시즌까지 21시즌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지휘봉을 잡고 전성시대를 연 당대 최고 명장이었다. 두 차례 3연패(1998-1999~2000-2001시즌, 2006-2007~2008-2009시즌)를 비롯해 최다 우승(13회)의 눈부신 금자탑을 쌓았다. 잉글리시 풋볼리그(EFL) 1부리그 시절까지 포함하면 1986-1987시즌부터 27시즌을 한결같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향한 열정을 불살랐던 퍼거슨 전 감독이다.
아스널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정반대로, 가장 낮은 충성도를 보인 클럽은 사우샘프턴이었다. 그리고 그 뒤는 첼시와 토트넘 홋스퍼였다. 사우샘프턴은 EPL에 몸담았던 25시즌 동안 21명의 감독이 사령탑에 앉아 꼴찌의 불명예를 안아야 했다. 거의 매 시즌 한 명꼴이었다.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라 할 만큼, 단명에 그쳤던 사우샘프턴 감독들이었다. 첼시와 토트넘은 33시즌 동안 18명이 사령탑을 지켰다. 감독 평균 재직이 2년에 채 못 미쳤다. EPL 명문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나름의 몸부림이었다고 변명할지 모르겠다.
사령탑 교체는 – 특히, 시즌 중 - 충격요법이다. 약효가 주효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자칫 잦은 교체의 악순환 고리에 빠져드는 부작용이 일 수도 있다. 따라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비록 고비에서 벗어나는 격장술의 한 방책으로 운용하더라도, 장기적 포석의 첫걸음을 내디디려는 조심스러운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아울러 감독이 팀 리빌딩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 줘야 한다. 믿음을 갖고 밀어줄 때, 감독도 신명 나서 기세를 돋울 수 있다.
“장수 나자 용마 났다.”라고 한다. 위기에 영웅이 나오듯, 명장도 좋은 때를 만나야 잠재력을 한껏 분출할 수 있다. 씨앗을 뿌려야 결실할 수 있듯, 여건을 조성한 뒤 감독의 역량을 기대해야 하지 않겠나. “투자 없는 성적은 있을 리 없다.” 스포츠계의 한결같은 금과옥조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