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자전(父傳子傳)은 어버이의 성격, 체질, 형상 따위의 형질이 자손에게 전해지는 과학적 현상으로 유전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멘델이 처음으로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스포츠계에서, 부전자전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물론 할아버지까지 3대가 대물림해 스타 플레이어로 활약한 예도 적잖다. 대표적 예로, 아이슬란드 축구 국가대표로서 모두 A매치 골을 기록한 귀드요흔센 3대를 꼽을 수 있다. 할아버지 아르노르→ 아버지 에이뒤르→ 손자 스베인 아론은 아이슬란드 축구를 대표하는 공격수 가족이다. 아르노르와 에이뒤르는 1996년 4월 벌어진 아이슬란드-에스토니아전에서 부자가 함께 뛴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차범근-차두리 부자도 세계적으로 대물림을 뽐낸 아버지와 아들이다. 아버지인 ‘황색 폭격기’ 차범근은 1980년대 서독(당시) 분데스리가를 풍미하며 세계적 공격수로서 위명을 떨쳤다. 아들 ‘차미네이터’ 차두리는 2000년대 한국 국가대표팀 부동의 오른쪽 풀백으로 활약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범근-두리 부자는 한때 세계 으뜸의 기록을 바탕으로 모두를 굽어봤다.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출장 기록을 보유한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는 130경기(이하 트랜스퍼마크트 기준)에서, 아들은 74경기에서 각각 태극 마크를 달고 A매치를 소화했다. 합계 204경기였다.
약관(弱冠·20세)의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된 차범근은 1972년 5월 7일(이하 현지 일자)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이라크전(0-0 무)에서 데뷔하며 자신의 시대가 막을 올렸음을 알렸다. 14년 뒤인 1986년 6월 10일 FIFA(국제축구연맹)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전(2-3 패배)에서, 한국 대표로서 막을 내렸다.
2002 한·일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4강 위업에 한몫했던 차두리는 2001년 11월 8일 세네갈을 상대로 한 친선 A매치(0-1 패배)에서 데뷔 무대에 올랐다. 묘하게도 아버지처럼 14년 뒤, 2015년 3월 31일 마지막 무대에 나섰다. 역시 친선 A매치로서 상대는 뉴질랜드였다(1-0 승).
2년 전, 이 기록은 덴마크의 ‘수문장(GK) 부자’인 페테르 슈마이켈-카스페르 슈마이켈에 의해 깨졌다. 슈마이켈 부자가 새로 세운 세계 최고 기록은 지금까지도 계속 경신되고 있다. 아들인 카스페르가 여전히 ‘데니시 다이너마이트(Danish Dynamite: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 별칭)’ 유니폼을 입고 맹활약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페테르는 121경기를, 아들인 카스페르는 107경기를 각기 소화했다. 15일 현재, 합계 228경기에 이른다.
범근-두리, 페테르-카스페르 두 부자만이 출장 합계에서 200고지를 넘겼다. 그만큼 대단한 ‘부자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슈마이켈 부자, 세계 최초로 클린 시트 50클럽 창설
그런데 최근 슈마이켈 부자가 또 하나의 금자탑을 세워 전 세계 축구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두 부자가 모두 ‘A매치 클린 시트 50클럽’에 가입하는 위업을 이뤘다. 물론, 세계 최초요 유일한 대기록이다. 그야말로 ‘슈마이켈 왕조(The Dynasty Schmeichel)’를 구축했다고 할 만하다.
클린 시트, 곧 무실점 경기는 GK라면 경기에 나서며 의당 각오를 다지며 세우는 목표다. 클럽 간 경기에서도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지향점이 아니다. 더구나 불꽃 튀는 공방전이 벌어지는 국가대표팀 간 경기라면 그만큼 더욱더 이루기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슈마이켈 부자가 연 새로운 지평이 더욱 돋보이는 까닭이다. 오랜 축구 역사를 통틀어 명멸한 숱한 스타 GK 가운데 A매치 클린 시트 50클럽에 발을 들여놓은 선수는 이제껏 37명에 불과한 점에서도 읽을 수 있는 어렵고 힘든 등정이다.
대기록이 세워진 무대는 2024-2025 UEFA[유럽축구연맹] 네이션스리그다. 리그 스테이지 그룹 A4에서, 카스페르는 2경기 연속 무실점 경기의 맹활약을 펼쳤다. 첫판 스위스전(6일·2-0 승)에서, 등정에 한 걸음만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나흘 뒤, 두 번째 판 세르비아전(10일·2-0 승)에서 마침내 대망의 고지를 밟았다. 슈마이켈 부자가 나란히 클린 시트 50클럽 가입의 신기원을 이루며 세계 축구사에 눈부신 발자취를 아로새기는 순간이었다.
페테르는 20세기 후반(1987년)부터 21세기 초반(2001년)까지 덴마크 골문에 물샐틈없는 그물망을 쳤던 전설적 수문장이었다. 국가대표로서 129경기[IFFHS(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기준]에서 GK 장갑을 끼고 빼어난 몸놀림을 뽐냈다. 그 결과물은 무실점 56경기로 나타났다.
A매치 클린 시트의 ‘대명사’는 이케르 카시야스다. 16년간(2000~2016) 스페인 국가대표팀 골문을 지키며 A매치 클린 시트 최고 기록을 세웠다. 167경기에 출장해 102경기에서 단 한 차례도 골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경기당 0.61실점, 그야말로 ‘자린고비 수문장’이었다. 이 부문 상위 5걸 가운데, 유일하게 0점대 실점률의 맹위를 떨쳤다(표 참조).
A매치 클린 시트 최다 기록 명부에서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 우리나라의 이운재다. 131경기에서 그라운드를 밟고 59경기에서 무실점의 빼어난 몸놀림으로 당당히 14위에 자리매김했다. 16년간(1994~2010) 태극 골문을 지키며 2002 월드컵 4강 위업 창출을 이룬 주역 중 하나에 걸맞은 준수한 기록이다.
현역 가운데 가장 윗자리엔, 사예드 자페르(바레인)가 자리했다. 2004년 처음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이래 지금까지 골문을 굳게 지키며 76경기 클린 시트(162경기 출장)로 5위에 올랐다.
슈마이켈 왕조는 앞으로도 자신들이 새겨 넣은 눈부신 기록의 장을 더욱 빛나게 할 듯싶다. 아들 카스페르가 아직도 현재 진행형 활약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얼마까지 대기록을 더욱 늘릴까 궁금할 뿐이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