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 정치적이죠, 그렇지만 인류애적 행동과 정치적 성향은 구분돼야 하지 않나요?".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전쟁 난민을 위해 달았던 푸른색 리본을 향한 오해의 가능성에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지난달 31일 방송된 MBC '손석희의 질문들(약칭 질문들)'에는 윤여정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는 '질문들'의 마지막 게스트였다. 또한 누구나 겪어야 하는 시간의 흐름, 그 안에서 늙어간다는 불변의 진리에 대한 답을 직접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만 했다.
진행자 손석희와 게스트 윤여정의 대담 중 가장 화제를 모은 것은 '난민'에 대한 이야기다. 윤여정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며 전쟁 난민을 위해 파란 리본을 달았던 바. UN에서 당시 러시아와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 위헤 제안한 '블루 리본'이었다. 그러나 자국내 난민 수용 문제와 맞물려 일각에서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던 터다.
정작 윤여정은 담담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 않나"라는 질문에 "주최 측의 권유로 리본을 달았다"라고 먼저 밝힌 뒤 "나도 난민 출신이다. 이북에서 넘어온"이라고 말했다. 6.25 전쟁 당시 그 역시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실향민 가족 중 한 사람이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더불어 그는 "우리는 다 정치적이다. 그렇지만 인류애적 행동과 정치적 성향은 구분돼야 하지 않나"라고 설명했다.
평소 연예계에서도 꼿꼿한 성품으로 정평이 난 윤여정이다. 그의 답변은 장황하지 않고 간결했으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 동시에 많은 이들이 잊고 있던 가치를 일깨웠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 전쟁 당시 한반도에 있던 사람들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이 고향을 잃었다.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반복하지 않아야 할 곳이 난민을 받아야 하는 시혜적 위치가 되자 비극은 손쉽게 망각됐다. 많은 이들이 실향민이라 불렸으나 실상은 난민과 다르지 않았을 참상, 그 기억을 윤여정은 잊지 않고 들려준 것이다.
윤여정은 본업인 연기로 한번 더 이 같은 심정을 보여준다. 지난달 23일 공개된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 시즌2를 통해서다. '파친코'는 재일교포 3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 미국을 오가며 전쟁과 평화, 사랑과 이별, 승리와 심판에 대한 서사시를 풀어낸 드라마다. 이 가운데 윤여정은 노년의 선자를 맡아 식민지 조선의 여인에서 재일교포로 정착하게 된 애환을 풀어낸다.
'파친코' 시즌2 첫 공개 당일 치러진 국내 프렌스콜에서도 윤여정은 스스로의 '늙음'을 강조했다. 자신과 동년배 친구들은 모두 자리에 누워있는 처지라며 시즌3는 본인 없이 제작해야 할 거라고. 재치있는 너스레에는 오히려 무게감이 담겨 있었다. 1947년생으로 올해 77세인 배우 윤여정, 1966년 데뷔해 반세기 넘게 60년 가까운 시간을 연기에 몸담아온 그이기에 나타낼 수 있는 존재감이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꺼이 '블루 리본'을 달고, '질문들'에서 난민에 대해 거리낌 없이 답하고,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고, '파친코' 시즌2에서는 이를 연기로 보여주는 언행일치가 기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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