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버햄튼 원더러스나 첼시와는 비교되는 행보다. 토트넘 홋스퍼가 손흥민(32) 인종차별 사건에 대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 없음을 보여줬다.
토트넘은 지난 18일(이하 한국시간)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타인캐슬 파크에서 열린 하츠와 프리시즌 친선경기에서 5-1로 이겼다. 지난 14일 케임브리지 유나이티드를 7-2로 대파한 데 이어 2경기 연속 승전고를 울렸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로드리고 벤탄쿠르의 손흥민 인종차별 이야기가 나왔다. 한 기자가 엔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에게 벤탄쿠르와 해당 사건과 관련해 나눈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달 15일 벤탄쿠르의 몰지각한 농담 한마디였다. 그는 우루과이 방송 '포르 라 카미세타'에 출연, 진행자로부터 한국 선수 유니폼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실상 토트넘 주장인 손흥민 유니폼을 달란 뜻이었다.
그러자 벤탄쿠르는 "쏘니?(손흥민의 별명)"라고 되물은 뒤 문제의 발언을 내놨다. 그는 "손흥민 사촌은 어떤가. 어쨌든 그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행자 역시 이에 맞장구를 치면서 함께 웃었다.
물론 벤탄쿠르가 손흥민을 싫어해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별 생각없이 나온 저질 농담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아시아인들 외모에는 차이가 없다는 인종차별적 시각이 드러난 발언이다. 남미에 동양인 차별 의식이 얼마나 만연한지 알 수 있는 방증인 셈. 아무리 익숙지 않은 다른 인종을 보면 구분하기 쉽지 않다지만, 명백한 문제였다.
당연히 논란이 커졌고, 벤탄쿠르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사과문을 올렸다. 그는 "쏘니 나의 형제여! 일어났던 일에 대해 사과할게. 그건 정말 나쁜 농담이었어. 나는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절대 당신이나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상처 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아줬으면 해! 사랑해 형제여"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역시 잡음을 피하지 못했다. 벤탄쿠르는 게시된 지 24시간이면 사라지는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사과문을 올렸고, 'Sonny' 대신 'Sony'라고 적는 실수까지 범했다. 무엇보다 벤탄쿠르가 정말 반성했다면 자신이 인종차별적 발언에 무감각했다고 정확히 인정하고 사과해야 했다. 단순히 '나쁜 농담'으로 취급하며 넘어가선 안 됐다.
이후 벤탄쿠르와 토트넘은 침묵을 지켰다. 결국 손흥민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벤탄쿠르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실수를 했고, 이를 알고 있다. 사과도 했다. 벤탄쿠르는 일부러 모욕적인 말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형제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이번 일로 하나가 됐다. 토트넘을 위해 싸우고자 프리시즌에 함께 돌아올 것"이라며 벤탄쿠르를 용서했다.
그러자 토트넘도 드디어 입을 열었다. 토트넘은 "구단은 문제가 긍정적인 결과에 이르도록 지원하고 있다. 선수들에게 다양성, 평등 등과 관련한 추가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손흥민이 문제가 해결됐다고 여기고 팀이 새 시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며 "우리의 영역, 나아가 더 넓은 사회에서 어떤 종류의 차별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다른 팀 팬들이 손흥민을 인종차별했을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뒤늦은 대응이었다.
그럼에도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벤탄쿠르는 두 번째 사과문을 게시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 손흥민을 언급했던 인터뷰", "그는 논리적으로 우리의 깊은 우정을 고려했을 때 이번 일이 단지 불행한 오해였다는 점을 이해했다. 다 해결됐다", "나는 절대 절대 다른 사람을 언급한 적 없다. 오직 손흥민뿐이었다" 등의 말로 해명하기에 급급했따.
아무리 벤탄쿠르가 직접 언급한 사람은 손흥민뿐이라지만 "모두 똑같이 생겼다"라는 말은 분명 한국인을 넘어 동양인 전체를 차별한 말이다. 게다가 벤탄쿠르는 '논리적으로(logically)' 이번 발언이 오해였다고 주장하며 많은 이들의 비판을 비논리적인 행동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말로 자기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다면 무의식 중에 갖고 있던 인종차별적 시각을 인정하고 모두에게 사과해야 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억울해 하는 건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벤탄쿠르 이야기가 나오자 말을 아꼈다. 먼저 벤탄쿠르가 코파 아메리카에서 4강 탈락한 뒤 관중석에 물병을 강하게 날린 사건에 대해선 모르쇠했다. 그는 "코파 아메리카는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대처된 것 같다"라고 답했다.
그런 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인종차별 사건에 대해선 손흥민의 뜻을 따르겠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손흥민이다. 그가 우리를 안내하고 이끌 것입니다. 문제를 처리하고 있고, 추후 추가 조치가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럴 때 당장 뛰어들어 판결을 내리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다. 이번 경우엔 손흥민이다. 우리는 그의 지시를 따를 것"이라고 밝혔다.
신중한 판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손흥민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책임회피성 발언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 감독이나 구단 차원에서 먼저 나서서 명확히 문제를 정리하고 인종차별에 선을 긋는 역할을 기대했지만, 그런 얘기는 일절 없었다. 한 팀의 수장으로서 최소한 벤탄쿠르의 발언은 인종차별이 맞고 재발을 막겠다는 말은 나와야 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첼시와 울버햄튼의 행보와는 다소 대조된다. 아르헨티나 선수단은 지난 15일 코파 아메리카에서 콜롬비아를 꺾고 우승했다. 그런 뒤 엔소 페르난데스(첼시)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팀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는데, 해당 노래 가사에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 이 영상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노래에는 "엄마는 나이지리아, 아빠는 카메룬 사람이지만 여권에는 프랑스라고 적혀 있지", "(킬리안) 음바페는 트렌스젠더들과 자는 걸 좋아해", "들어봐. 그리고 널리 퍼뜨려. 그들은 프랑스에서 뛰지만, 모두 앙골라 출신이야" 등의 가사가 담겨 있었다. 이는 이미 아르헨티나가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프랑스를 꺾고 우승했을 때 팬들이 불러 비판받았던 노래였다.
가사가 자극적인 만큼,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첼시 1군만 봐도 악셀 디사시, 브누아 바디아실, 레슬리 우고추쿠, 크리스토퍼 은쿤쿠, 말로 귀스토, 웨슬리 포파나 6명의 프랑스 국적 흑인 선수가 있다. 아버지가 코트디부아르인인 포파나는 논란의 영상을 공유하며 "2024년의 축구. 거리낌 없는 인종차별"이라고 항의했고, 디사시와 귀스토는 엔소와 팔로우를 끊었다.
일단 엔소는 빠르게 사과문을 올리며 잘못을 인정했다. 그는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다"며 "나는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하며, 코파 아메리카 축제의 도취감에 사로잡힌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 정말 죄송하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첼시는 "차별적 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라고 공식 성명을 발표하며 자체 징계 조치에 착수했다.
울버햄튼도 황희찬 인종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황희찬은 지난 16일 이탈리아 세리에 A 승격팀 코모 1907과 프리시즌 친선경기를 치르던 도중 인종차별 발언을 들었다. 울버햄튼 지역지 '익스프레스 앤드 스타'는 "울버햄튼의 연습 경기는 인종차별 논란으로 얼룩졌다. 다니엘 포덴스는 코모 1907과 경기 도중 황희찬에 대한 인종차별적 학대를 듣고 상대 수비수를 주먹으로 때려 퇴장당했다"라고 보도했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코모 수비수가 동료를 향해 "그(황희찬)는 무시해. 그는 자신이 재키 찬(성룡)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황희찬과 울버햄튼 선수들이 항의했고, 양 팀 선수들이 한데 모여든 것. 포덴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리기까지 했다.
게리 오닐 울버햄튼 감독은 경기를 중단하고 싶은지 묻는 등 황희찬의 마음에 가장 먼저 신경 썼다. 그리고 '전폭적 지원'을 보내겠다고 약속하며 코모 측에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울버햄튼 구단도 유럽축구연맹(UEFA) 공식 항의서를 제출했고, 잉글랜드축구협회(FA)와도 협력하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축구협회에도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계획이다. 여러 모로 토트넘과는 대조될 수밖에 없는 대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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