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구 천하’를 반분한 루카 모드리치(38·크로아티아)의 기세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3일 천하’로 끝날지, 아니면 계속될지 운명의 갈림길을 맞닥뜨린 상황이다. 공교롭게도, 그 지속 여부의 관건은 ‘축구 누리’의 다른 반쪽을 차지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9·포르투갈)에 달려 있는 형세다.
지난 15일(이하 현지 일자), 이틀째 벌어진 UEFA(유럽축구연맹) 유로 2024 마당에서, 모드리치는 뜻깊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룹 스테이지 B 첫판 스페인전에서, 유로 무대를 화려하게 수놓는 발자취를 남겼다. 유로 사상 최고 기록으로 아로새겨진, 대단한 의미가 담긴 이정표였다.
모드리치가 등극한 왕좌는 유로 최다 대회 출전이다. 5회 연속 출전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 펼쳐진 2008 대회부터 이번 독일 대회까지 16년 동안 끊임없이 유로 무대에 오르며 세운 대기록이다(표 참조). 스페인전에서, 선발 출장한 모드리치는 65분간 그라운드를 누비며 이 부문 최고 반열에 발걸음을 들여놓았다.
오랜 세월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로서 각광받아 온 모드리치는 이로써 2대 메이저 대회(FIFA 월드컵, 유로)에 아홉 번째 출장하는 감격을 아울러 누렸다. 지금까지 9회 이상 2대 무대에 오른 유럽 선수는 로타어 마테우스(63)와 호날두 등 단 두 명뿐이다. 은퇴한 마테우스는 1980~2000년 ‘전차 군단’의 핵으로 활약하며 월드컵(5회)과 유로(4회) 마당에서 존재감을 뽐낸 바 있다. 이 부문 가장 윗자리엔, 호날두가 앉아 있다. 호날두는 월드컵과 유로 각 5회씩 모두 10회 무대에 올랐다(이하 6월 17일 현재).
모드리치, 유로 최다 대회 출장 기록에서 일단 호날두와 어깨 나란히
모드리치가 들어선 영역엔, 이미 호날두가 옥좌의 주인공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홈그라운드에서 열린 2004 대회 때 첫 연(緣)을 맺은 뒤 유럽 11개국에서 분산 개최된 2020 대회까지 5회 연속 유로 마당에서 뛰놀며 아무도 밟지 못한 지경을 개척한 바 있다.
지난 4년간, 호날두는 홀로 영광을 누려 왔다. 그런데 유로 2024 막이 오르면서, 형세가 일변했다. 모드리치가 뛰어들며 자신의 독무대였던 세상의 한쪽을 나눠 줄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제 시선은 오는 18일 오후 9시(한국 시각 19일 오전 4시) 열릴 그룹 F 두 번째 판인 포르투갈-체코전에 온통 쏠릴 듯싶다. 호날두가 이 한판에 모습을 나타낸다면, 새로 열린 ‘모드리치 시대’는 3일 만에 고별을 고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찬란한 빛은 오로지 호날두에게만 향한다. 여섯 번씩이나 유로 마당에 발자취를 남겼다는 사실은 폄훼하기 어려운 엄청난 대기록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로 무대에서, 최다 출장(69경기)과 최다 득점(55골) 기록을 아울러 갖고 있어 더욱 그렇다.
모드리치는 같은 시대에 호날두와 각축을 벌이게끔 안배한 신을 원망스럽게 여길지 모르겠다. 최다 출장 경기 부문에서도 호날두에 밀려 2위(60경기)에 자리한 모드리치다.
모드리치는 오히려 자신을 쫓아 오는 페페(41·포르투갈)라는 존재가 더 부담스러울 듯하다. 호날두와 셀레상(A Selecção: 포르투갈 국가대표팀 별칭)에서 한솥밥을 먹는 페페가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페페도 이번 유로 무대에 오르면 5개 대회 출전 반열에 당당히 얼굴을 내밀 수 있다. 모드리치와 마찬가지로 2008 대회 때 유로 무대에 데뷔한 페페는 2020 대회까지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줄곧 연기해 왔다.
1960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으로 발원한 유로는 이번 독일 대회까지 17회 치러지며 대륙별 남자 국가 대항전 중 으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만큼 패권을 다투는 열전이 벌어지는 전장이어서, 예선 관문을 뚫고 본선 마당을 밟을 수 있다는 자체만도 대단한 전과라 할 만하다. 따라서 4년 주기로 펼쳐지는 본선 대회전 출장 기록에서, 상위에 자리한 선수는 그야말로 당대를 누빈 월드 스타로서 손색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맥락에서, 이번 독일 대회를 디딤돌로 3위 그룹(4개 대회 출장)에 뛰어든 존재들도 눈에 띈다. 특히 개막전에서, 스코틀랜드를 대파(5-1)한 ‘디 아들러(Die Adler·독수리: 독일 국가대표팀 별칭)’는 세 명씩이나 쏟아냈다. 2012 폴란드·우크라이나 대회 때 유로에 첫선을 보인 토니 크로스(34), 마누엘 노이어(38), 토마스 뮐러(34)가 그들로서 이번 대회 막을 연 스코틀랜드전을 통해 3위 반열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모드리치와 호날두는 한 둥지에 몸담았던 시절이 있었다. 2012-2013시즌부터 2017-2018시즌까지 6시즌 동안 호흡을 맞춰 유럽 마당에 맹위를 떨치며 ‘레알 마드리드 왕조’를 구축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를 달리하고 최고 기록을 다투는 운명에 처했다. 참으로 신의 희롱으로 빚어진 ‘얄궂은 운명’이라 할 만하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