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전 독일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나 싶었지만, 인종차별적 의식은 여전히 만연해 있었다. 손흥민(32, 토트넘 홋스퍼)이 어릴 적 겪었던 아픔에 다시 한번 노출됐다. 그것도 함께하는 팀 동료로부터 말이다.
토트넘 미드필더 로드리고 벤탄쿠르는 손흥민과 동양인을 향한 인종차별적 발언을 내놨다. 그는 지난 15일(이하 한국시간) 우루과이 TV 프로그램 '포르 라 카미세타'에 출연해 손흥민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은 다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당시 벤탄쿠르는 진행자로부터 한국 선수 유니폼을 부탁받았다. 사실상 토트넘 주장인 손흥민 유니폼을 달란 뜻이었다. 벤탄쿠르도 "쏘니?(손흥민의 별명)"라고 되물었다.
문제는 벤탄쿠르의 다음 발언. 그는 "손흥민 사촌의 유니폼일 수도 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행자 역시 이에 맞장구를 치면서 함께 웃었다.
물론 벤탄쿠르가 손흥민을 싫어해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별 생각없이 나온 저질 농담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는 아시아인들 외모에는 차이가 없다는 인종차별적 시각이 드러난 발언이다. 남미에 동양인 차별 의식이 얼마나 만연한지 알 수 있는 방증인 셈. 아무리 익숙지 않은 다른 인종을 보면 구분하기 쉽지 않다지만,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당연히 논란이 커졌고, 벤탄쿠르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사과문을 올렸다. 그는 "쏘니 나의 형제여! 일어났던 일에 대해 사과할게. 그건 정말 나쁜 농담이었어. 나는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절대 당신이나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상처 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아줬으면 해! 사랑해 형제여"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잡음을 피하지 못했다. 벤탄쿠르는 게시된 지 24시간이면 사라지는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사과문을 올리면서 일부 팬들의 비판을 받았다. 현재 사과문은 내려간 상황이다.
게다가 벤탄쿠르는 'Sonny'가 'Sony'라고 적는 실수까지 범했다. Sony는 손흥민의 애칭이 아니라 일본의 전자제품 기업 이름이다. 무엇보다 벤탄쿠르가 정말 미안했다면 자신이 인종차별적 발언에 무감각했다고 인정하고 사과해야 했다. 단순히 '나쁜 농담'으로 취급하며 넘어간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손흥민은 명실상부한 월드클래스 공격수로 프리미어리그 정상급 스타다. 그는 지난 시즌부터 주장 완장까지 차면서 토트넘 역사상 최초로 비유럽 국적 캡틴으로 활약 중이기도 하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축구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손흥민이다.
하지만 손흥민을 향한 인종차별적 시각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독일 무대에 발을 내디뎠던 2008년과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은 여전히 만연하다. 벤탄쿠르에게 악의는 없었을지 몰라도 차별에 직접 맞서 싸웠던 손흥민과 그를 응원하던 동양인들로서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영국 '텔레그래프'도 손흥민의 과거 인터뷰를 언급하며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갔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 득점이 남다른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손흥민은 "난 어렸을 때 독일로 갔다. 상상하지도 못하는 힘든 생활을 많이 했다. 인종차별도 많이 당했고, 정말 힘든 상황을 겪었다. 언젠간 꼭 갚아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었다"라고 밝혔다.
평소 손흥민의 성품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발언. 그가 얼마나 이를 악물고 뛰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인터뷰였다. 문제는 손흥민의 이야기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점. 벤탄쿠르를 옹호하는 우루과이 팬의 태도만 봐도 남미에서는 인식이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손흥민이 인종차별 피해를 입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프리미어리그에서 9년간 활약하면서 수 차례 인종차별에 시달렸다.
지난 2019년 한 웨스트햄 팬은 손흥민을 '불법 복제 DVD 파는 사람'이라고 조롱한 뒤 벌금형을 받았고, 한 첼시 팬은 인종차별적 제스처로 경기장 출입 금지 징계를 받았다. 지난해에도 크리스탈 팰리스 팬과 노팅엄 포레스트 팬이 손흥민을 향한 인종차별로 경기장 출입 금지와 벌금형을 받은 바 있다.
벤탄쿠르도 이번 발언으로 징계를 받게 될 수 있다. 텔레그래프는 그가 잉글랜드 축구협회(FA) 조사를 받게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인종차별 혐의가 인정될 경우 출전 정지 처분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이미 비슷한 사례도 있다. 베르나르두 실바(맨체스터 시티)는 5년 전 소셜 미디어에 동료 뱅자맹 멘디의 어릴 적 사진과 흑인을 연상케 하는 스페인 과자 브랜드 캐릭터 사진을 함께 올리며 '누군지 맞춰 봐'라고 적었다. 둘은 친한 사이에 나온 장난이라고 해명했으나 FA는 1경기 출전 정지와 벌금 5만 파운드(약 8800만 원) 징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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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로드리고 벤탄쿠르, 베르나르두 실바 소셜 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