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초연이었다. 멋들어진 연주로 빚어져 90분간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 ‘데뷔 교향곡’이었다. 지휘자와 연주자가 하나를 이룬 ‘한국축구 A교향악단’은 절묘한 화음을 빚어내 청중(?)을 매료했다. 싱가포르 국립경기장을 가득 메운 5만 관중의 환호와 감탄을 자아낸 첫 연주회였다.
지휘자와 연주자가 호흡을 맞춘 지는 채 2주가 되지 않았다. 지난 5월 20일 지휘자로 선임된 김도훈 감독(53)은 이레 후인 27일 연주자들을 낙점함으로써 초연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도 기대한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 좀처럼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한 완벽한 연주를 펼쳤다.
김 감독부터가 A교향악단과는 첫 상면이었다. 2015년 인천 유나이티드 사령탑에 앉은 지 9년 만에 잡은,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A대표팀 지휘봉이었다. ‘임시’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달리긴 했어도, 사명감을 불사른 김 감독의 열정을 사그라지게 할 순 없었다.
연주자엔, 상당수가 A교향악단과 첫 인연이었다. 황인재(30·포항 스틸러스), 하창래(29·나고야 그램퍼스), 박승욱(27·김천 상무), 오세훈(25·마치다 젤비아), 최준(25·FC 서울), 황재원(21·대구 FC), 배준호(20·스토크 시티) 등 7명이 첫걸음을 들여놓았다. 23명 가운데 ¼을 넘는 비중일 만큼 두드러지게 나타난 ‘초보 연주자’ 발탁이었다.
이처럼 A교향악단과 전혀 연(緣)을 맺지 못했던 지휘자와 연주자가 여럿 포진한 태생적 배경으로, 2026 북중미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무대를 앞두고 염려도 뒤따랐다. 비록 이미 3차 예선 티켓을 거머쥐었다고는 하나, 시드 배정을 위해선 ‘필승 전략’이 필요한 데서 비롯한 근심스러운 시선이었다. 자칫 1위에 오르지 못함으로써 3개 그룹으로 나뉘어 벌어질 3차 예선에서 시드를 받지 못하고 일본 또는 이란과 같은 조에 묶여 험난한 여정을 밟아야 한다는 우려였다.
더구나 기억하기조차 싫은, 두 번의 참패로 말미암은 ‘카타르 악몽’은 이런 걱정을 더욱 부채질했다. 2023 카타르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준결승 요르단전(0-2 패배·지휘 위르겐 클린스만)과 비록 A매치는 아닐지언정 2024 카타르 AFC U-23 아시안컵 8강 인도네시아전(승부차기 10-11 패배·지휘 황선홍)으로 쌓인 ‘약체 상대 트라우마’는 충분히 그럴 만한 심리적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기우(杞憂)였다. ‘김도훈과 아이들’은 결코 허명에 의해 자리매김한 어수룩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 줬다. 4악장으로 구성돼 초연된 데뷔 교향곡의 대단원은 이를 입증했다. 7-0 대승이었다. 4년 8개월 만에 나온 압도적 승리의 개가다. 2019년 10월에 열린 2020 카타르 FIFA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에서, 스리랑카에 골 세례를 퍼부으며 올린 대첩(8-0) 뒤 처음 나온 7골 차 이상 대승을 한껏 소리 높여 연주했다.
A교향악단 첫 인연 김도훈, 빼어난 지휘 솜씨 뽐내…초보 연주자까지 어우러져 완성도 더욱 높여
김도훈 감독은 2년 가까이 야인으로 초야에 묻혀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을 통해 단 한순간도 무위도식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었다. 세계 축구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며 역량을 키우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파는 물론 해외파의 특성과 경기력을 완전히 파악함으로써 데뷔 교향곡을 빼어나게 지휘할 수 있었다. 세월을 미끼로 세상에 다시 나올 시기를 낚고 있었음이 눈앞에 그려진다.
전략 수립 및 전술 운용도 대단했다. 무엇보다도 ‘정신 무장’이 돋보였다. 호랑이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하듯, 90분 내내 흐트러지지 않고 온 힘을 쏟아 연주에 집중하는 마음가짐이 배어났다. 각 파트에 들어맞는 연주자 배치와 그때그때 어떤 연주를 어떻게 다양하면서도 하나의 맥으로 이어 가며 들려줄지 애쓰는 지휘자의 빼어난 지휘 솜씨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종전과 달리, 양 날개로 포진한 손흥민(31·토트넘 홋스퍼)과 이강인(23·파리 생제르맹)이 폭넓게 벌려 서서 마음껏 공간을 휘저은 뒤 중앙으로 파고들며 연주에 마침표(골)을 찍는 모습은 그 대표적 보기였다. 각 악장의 특성에 맞춘 교체 투입도 무척 신선하기만 했다.
이 같은 지휘자의 의중은 연주자들의 뛰어난 소화로 악장마다 완벽하게 구현됐다.
서곡은 이강인이 들려줬다. 현란한 몸놀림에 이어 자신의 A매치 첫 오른발 득점포로 결승 선제골(전반 9분)을 터뜨렸다.
1악장은 뒤늦게 A교향악단에 입단한 ‘늦깎이’ 주민규(34·HD FC)가 대표 연주자로 나섰다. 두 번째로 대승의 물꼬를 텄다(전반 20분). ‘A매치 데뷔골’로서 감회가 더욱더 깊고 색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주민규는 이날 3개의 어시스트로 각 악장의 대표 주자들의 연주를 한결 돋보이도록 했다. 한국 A교향악단의 역대 FIFA 월드컵 공연에서, 한 개인의 1골 3어시스트 연주는 이제껏 아무도 들려주지 못한 초유의 쾌거가 아닐까 싶다. 이번 싱가포르 공연의 실질적 대표 연주자라고 높이 평가할 만한 개가였다.
2~3악장은 손흥민과 이강인이 책임졌다. 불과 1~2분 사이로, 숨 쉴 틈 없는 연주가 펼쳐졌다. 손흥민(후반 8분)→ 이강인(후반 9분)→ 손흥민(후반 11분)이 갈마들며 잇달아 쐐기 추가골을 꽂아 넣었다.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마지막 4악장에서 다시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연주가 이어졌다. 후반 34분, 데뷔 교향곡에 걸맞게 교체로 투입된 초보 연주자들이 손발을 맞춰 들려준 작품이 나왔다. 박승욱의 도움을 받아 배호준이 여섯 번째 골을 뽑아냈다.
대미는 황희찬(28·울버햄프턴 원더러스)이 장식했다. 후반 37분, 마지막으로 싱가포르 골문을 열어젖혔다.
한국 A교향악단은 올 초 한 차례 외우내환을 겪었다. 아시안컵 참패→ 콜린스만 감독 파문→ 탁구 게이트가 잇달아 돌출되며 늪 속에서 허덕였다. 이번 데뷔 교향곡 초연의 성공으로, 위기를 기회로 반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김 감독이 오는 11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질 두 번째 연주회를 다시 한번 환상의 무대로 빚어내며 확실히 위기 탈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릴까 기대된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