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선택하지 마! 생각도 하지 마! 그냥 내 말 들어! 너는 살아! 사는 거야! 제발.. 살자!”
20일 방송된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백현우(김수현 분)는 넘어올 것 없는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찔러 넣기라도 한 것처럼 진심을 토해냈다.
홍해인(김지원 분)은 살면서 그토록 단호한 현우의 화법을 들어본 적이 없다. 툭하면 차오르던 눈물의 자취도 없이 차돌처럼 단단한 확신과 의지를 담은 눈동자로 올곧게 응시해 온다.
해인으로선 현우의 그런 단호함이 야속하다. 진료실 문 앞까지 와서야, 살 수는 있지만 기억을 모두 잃을 거란 말을 들었을 때, 온 몸의 기력이 빠져나가는 섬뜩함을 느꼈었다. 간신히 힘을 내 “며칠 좋은 꿈 꿨다 칠게!”하고 돌아섰으련만 기어코 돌려세워 저런 표정, 저런 말투로 몰아세우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장소들, 살아온 모든 일들 다 잊어버리고 그저 살기만 하라고? 할아버지 홍만대(김갑수 분) 회장의 마지막 당부가 “허무하지 않은 마지막을 맞이하기 바란다”였는데 홍해인으로 살아온 모든 기억을 허공에 날리고 빈껍데기로 살아가라고?
도대체 이 남자는 내게 왜 이럴까? 죽을 힘을 다해 겨우겨우 죽겠다는 나를 왜 말릴까? 그런 식으로는, 홍해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는, 더는 힘내서 살아볼 자신이 없어 이쯤에서 주저앉겠다는데, 기어코 부축해 일으키겠다는 저 단단한 의지는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왜 자꾸만 살고 싶게 하는 거냐고! 요즘 들어 부쩍 닥쳐온 행운들, 그 행복한 기억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데.. 도대체 왜 그걸 포기하라고 강요하냐고!
삶이란 게 연습없이 태어나 훈련없이 죽는 거지만 해인은 할아버지 홍만대 회장의 장례를 치르며 죽음을 리허설 해 보는 기분을 느꼈었다. 독일 병원의 치료법 얘기를 듣기 전, 병원에서 선고한 석 달은 이미 지나간 시점이었다.
리허설을 관전한 홍해인의 감상은 ‘죽음이라는 게 참 구체적인 의식’이라는 것. 온 가족이 와서 땅 파고, 관 묻고, 간이 천막 아래서 국밥 먹거나, 무덤가에서 울다가, 시간 되면 다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결국 죽은 이 혼자 남겨진다는 사실이 석연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살고 싶었다. 죽은 이야 어떻든, 또 유족들의 상실감과도 상관없이, 햇살은 눈부셨고 구름은 몽글몽글했으며 새들조차 이쁘게 지저귀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은 사람 약올리는 것처럼 좋기만 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서글플까.
그런 판에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절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해인은 걱정하는 현우에게 벅차오른 채 말했었다. “아니 괜찮아. 괜찮은데, 이렇게 괜찮은 게 너무 오랜만이라 우는 거야. 너무 좋아가지고.. 나쁜 꿈을 오래 꾸다 깬 것 같은 기분이야.”
세상은 아름다웠다. 소중했다. 현우와 소풍 간 자리에서 앞날을 기약하며 문득 ‘앞으로’란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도 울컥했다.
‘앞으로?.. 앞으로라니..’ 말이 끊기자 걱정스레 바라보는 현우 표정이 우스웠다. “앞으로란 말이 이렇게 좋은 건 줄 몰랐어. 당신의 앞으로 내가 없을 예정이었는데 이제 우리의 앞으로가 생겼잖아. 그래서 말인데 당신의 이혼 취소 요청을 받아들일게.” 약지에 낀 현우의 프로포즈 반지를 보여주었을 때 현우가 부드럽게 안아왔다.
“무르기 없다.”는 현우의 대꾸는 가소로웠다. 걱정할 걸 걱정해야지. 명색이 백화점 사장인데, 무르기, 반품 같은 걸 용납할까 보냐? “나중에 니가 이 약속이 기억이 나네, 안나네 해도 소용없어.” 이 남자 말이 많은 남자였네. 좀 닥쳐주면 안될까? 그래서 입 밖으로 제지했다. “나 이렇게 가만히 당신 심장소리 듣고 있는 게 좋단 말야!”
촌 아낙네들처럼 새끼 손톱에 봉숭아 물도 들여봤다. 첫 눈 올 때까지 봉숭아 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고? 겨울·첫 눈.. 더는 해당사항 없을 줄 알았던 단어들이 기대해도 좋은 단어가 되어 설렜는데 현우는 엉뚱하게 ‘첫사랑’에 꽂혀 발끈한다. 도대체 이 남자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
그래놓고 정작 이 남자 백화점 크리스마스 점등 리허설 때 스노우 메이커까지 작동시켰다. “가을에 눈을 다보네?” 했더니 “첫 눈 일찍 보길 원했잖아.”란 대꾸가 돌아온다. 그러니 당신 작품이란 얘기지? 좀 약올려 볼까? “그러게, 나 좀 이제 뭔가 풀리려나 봐. 이제 아주 첫사랑까지 이뤄지겠네.”했더니 “아니 그러라고 내리는 눈이 아닐 텐데... 진짜 어떤 놈이길래 그러냐?” 진짜 삐질 기세다.
“372번 버스였지? 예전에 당신 퇴근할 때 타던 버스. 맨 뒤 창가 자리에 항상 앉았었지. 내가 당신 퇴근하는 버스 따라서 한강을 몇 번이나 건넜다고.” 당췌 못알아듣는 기색이다. “내가 말한 버스맨의 버스가 372번이고 맨은 당신야.” “어?” 이래도 못알아 듣는다고? ‘바보 아냐?’란 말을 “근데 서울댄 어떻게 간 거야?” 에둘러 말했더니 그제야 알아듣고 좋댄다. “어? 나야? 버스맨 나야?”
해인으로선 그런 기억들이 너무 소중한데.. 시댁을 떠나 싸워도 도망갈 데 없는 아늑한 현우의 오피스텔에서 신혼부부처럼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눕고, 함께 장보고, 함께 설거지 하고, 함께 드라마 보는 기억들이 너무 선연한데.. 매일매일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 너무 행복해 문득문득 ‘이대로 죽어도 좋아’ 싶던 순간들이 즐비한데.. 그런 행복한 기억들을 없던 일로 만든 채 살아가라고?
결정적으로 고등학교 시절 운동장 MP3에서 비롯된 역대급 운명 서사의 주인공 백현우를 잊은 홍해인이 가당키나 한 거냐고?
해인이 그렇게 ‘죽느냐, 살고 잊냐’의 문제로 혼란스러운 동안. 현우는 착실히 수술 이후의 해인을 위한 작업을 준비한다.
“안녕 홍해인! 나는 백현우라고 해. 나는 니 남편야. 지금 너무 당황스럽고 무섭지? 나도 그래. 아무 것도 기억 안나는 데 처음 보는 사람이 남편이라고 하고..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지? 근데 이거 좋은 일이야. 너가, 너가 많이 아팠었는데 다시 살아난 거거든.. 예전에 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겠지만 생각이 안나는 게 속상하겠지만 걱정하지마. 내가 다, 내가 다 기억하고 있어 내가 아는 모든 걸 너한테 말해 줄 게...사랑해 해인아! 사랑했고, 사랑할게!”
현우가 그렇게 천천히 해인과 다시 다정해질 준비를 하는 동안 윤은성도 준비한다. “두 사람 관련된 물건은 다 치워요. 백현우씨 관련된 물건은 따로 전달해주고.” 해인의 집에서 현우의 흔적을 다 치우고 수술 마쳐 기억 잃을 해인을 기만할 궁리를 마친 후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해인의 뇌는 기억을 잃을 모양이다. 하지만 해인의 귀는 현우의 심장박동을, 해인의 눈은 어정쩡한 현우의 미소를, 해인의 머리카락은 고장 난 헤어드라이어로 말려주던 현우의 손길을 기억할텐데.. 아무래도 윤은성은 이번에도 헛물을 켜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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