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속담이다. 쫓겨나듯 떠나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였다. 그런데 새로 찾아든 둥우리인 사우디아라비아 프로페셔널리그(SPL)에선, 훨훨 날아다닌다. 그야말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9·알나스르)에겐 ‘동방의 낙원’이요 ‘황금향’인 SPL이다.
흡사 독무(獨舞)를 보는 듯싶다. SPL을 휩쓸며 판친다. 횡행천하가 따로 없다.
활보하며 각종 기록을 쏟아 낸다. 대부분 전성기에 쌓은 업적을 바탕으로 세운 기록의 연장선이다. 요란스러운 몸놀림과 발걸음인데, 과연 어디까지 그 가치를 인정하고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다.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기록 행진이다.
물론, 기록 자체는 높게 평가해야 한다. 우리 나이로 불혹(不惑), 곧 축구 선수로 보면 ‘할아버지’라 할 만한 점에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기록 퍼레이드다. 골 폭발은 놀라움마저 자아낸다. 단지 어느 무대에서 연기해 성과를 올리고 있는지는 한 번쯤 눈여겨보고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EPL을 등지고 SPL로 향했던 2022년 말, 호날두는 분명 하향세였다. 누가 봐도 금세 읽을 수 있을 만치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몸담았던 2022-2023시즌 전반부에, 호날두는 10경기에서 고작 1골만을 넣은 상태였다. 2021-2022시즌 30경기에서 18골을 뽑아냈던 골 솜씨는 어디론가 ‘실종’된 듯 깊은 침체의 늪에서 허덕였다.
금세기 으뜸의 득점력을 뽐내던 호날두였건만, 세계 최고의 축구 마당으로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철칙’이 지배하는 EPL 앞에선, 한낱 무력한 존재에 불과한 그때의 모습이었다. 더는 EPL의 밀림에서 살아남기 힘든, 힘 빠지고 노쇠한 호랑이로 전락한 이미지까지 풍겼던 호날두였다.
결국, 버거움을 지울 수 없었던 호날두는 새로운 ‘엘도라도(El Dorado)’를 찾아 나섰다. 그곳은 아직은 ‘축구 변방’이랄 수 있는 SPL이었다. 그래도 골 감각만은 여전한 호날두를 마땅히 제어할 만한 상대가 없는 SPL은 그에게 내일을 약속하는 신천지로 다가왔다.
새로운 활동 무대로 삼은, 그러나 호랑이 없는 SPL에서, 호날두는 마음껏 활보하는 모습이다. 2022-2023시즌 16경기에서 14골을 잡아내며 손쉽게 적응기를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2023-2024시즌 활화산처럼 용솟음치는 기세를 뽐내고 있다. 24경기를 소화하며 29골(4일 현재·이하 현지 일자)을 터뜨렸다. 경기당 평균 1.21골이라는, 불혹의 나이를 잊은 것 같은 노익장의 무서운 골 폭발력을 과시하고 있다. 2위(22골)를 달리는 알렉산다르 미트로비치(29·알힐랄 SFC)를 멀찍이 따돌리며 선두를 내달린다.
SPL 지난 2경기에서, 호날두는 대폭발했다. 홈 알타이전(3월 30일·5-1 승)과 어웨이 아브하전(4월 2일·8-0 승)에서 잇달아 해트트릭을 터뜨렸다. 더욱이 아브하전에선, 불과 46분만 뛰고도 3골을 뽑아내는 공포의 득점력을 보였다.
SPL 누비며 자신이 지닌 21세기 최다 해트트릭 기록 늘려 가
자연스레, 호날두의 걸음걸음엔, 각종 기록이 뒤따른다. 특히, 골 관련 기록을 잇달아 세우며 SPL을 누빈다. 신기록은 신기록인데, 대부분 자신이 지닌 기록을 한 걸음씩 늘려 가는 모양새다. 새로운 기록인데도 식상함마저 느끼는 까닭이다.
최근, 호날두는 또 하나의 기록을 쌓아 갔다. 21세기 최다 해트트릭 수립이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자신이 보유한 기록을 늘려 새로 썼다. 지난 2경기 해트트릭 폭발에 힘입어 두 걸음 더 나아가며 여유 있게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호날두는 2002-2003시즌 포르투갈 프리메이라리가 스포르팅 CP에 둥지를 틀고 프로 1부 세계에 뛰어들었다. 이번 시즌까지 23시즌을 줄기차게 뛰며 기록한 해트트릭(3골 이상)은 총 65회에 이른다. 같이 ‘신계의 사나이’로 불리며 당대 천하를 양분했던 리오넬 메시(36·인터 마이애미 CF)를 크게 따돌리며 2위(57회)로 밀어낸 ‘폭풍 질주’다(표 참조).
호날두는 이번 시즌에만 세 차례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이에 비해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UMLS)를 활동 영역으로 삼고 있는 메시는 이번 시즌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호날두의 해트트릭 발자취를 대회별로 세분해 살펴보면, ▲ 국내 리그 44회 ▲ 국내 컵대회 2회 ▲ 국제 클럽 대항전 9회 ▲ 국가대표팀 경기(A매치) 10회로 엮여 있다. 골로 기준을 삼으면, ▲ 3골 54회 ▲ 4골 9회 ▲ 5골 2회로 이뤄졌다.
호날두는 SPL 이번 시즌 득점왕 주인공 역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 형세라면 각종 골 기록 양산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까 싶다. 호랑이 없는 골을 휘젓는 토끼 같아 씁쓰레한 기분을 지우기 힘들지만, 그 자신만은 휘뚜루마뚜루 돌아다닐 수 있는 SPL이 만만하게 보일 것 같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