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뒤에 공은 없다.”
GK라면 소리 높여 외치고 싶은 금언(金言)일 듯하다. 그럼직하다. GK 최고의 덕목이라면 클린 시트(Clean Sheet), 곧 무실점 경기 아니겠는가. 상대에게 골을 내주지 않는다면, 최소한 승리의 충분조건을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무승부(0-0)는 보장되니 말이다.
축구에서, GK의 비중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대장정으로 펼쳐지는 리그에선, 더욱 GK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우승할 수 있느냐를 가름하는 전제 조건으로, 뛰어난 GK를 갖추었느냐가 가장 먼저 거론되는 배경이다. “단기 대회에서, 공격력은 등정의 제일 요소다. 그러나 장기 대회에선, 우승의 밑받침은 수비력이다”라는 축구계 격언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했다.
빌드업(Buildup)이 전술의 총아로 떠오르며 주류로 자리한 요즘엔, GK가 더욱 각광받는다.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 시, GK가 그 전개 과정의 첫걸음이 되는 경우가 아주 많이 눈에 띄는 현대 축구다. 이제 웬만한 GK는 공격수에 버금가는 발재간을 뽐내곤 한다.
이래서 GK가 그라운드를 밟으며 품는 열망은 무실점 경기일 수밖에 없다. 기록지의 실점란을 깨끗한 백지상태로 남길 때, 승리 요건의 밑바탕을 마련한 주역으로서 갈채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전 세계 축구 역사에서, 가장 많은 클린 시트 경기를 연출한 GK는 누구일까? IFFHS(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가 그 해답을 내놓았다. 지난 27일(이하 현지 일자) 창설 40주년을 맞아 의욕적으로 선보인 최초의 통계에서, 주인공의 얼굴이 밝혀졌다.
추격권 멀찍이 따돌려 수년 내 깨지지 않을 뜻깊은 기록
지난 28일, IFFHS는 국제 클럽 대회를 기준으로 한 클린 시트 최다 경기 GK를 발표했다. IFFHS가 공들여 추출해 공개한 이 통계에서, 스페인 라리가 비야레알 CF의 수문장인 페페 레이나(41)가 가장 윗자리에 앉았다. IFFHS는 레이나를 비롯해 클린 시트 50경기 이상을 기록한 17명을 추려 공표했다. 아직도 플레이어로서 진가를 발휘하는 7명과 은퇴하고 레전드로 남은 10명으로 엮어진 17명이었다.
24시즌째 최후 보루 역을 연기하고 있는 레이나는 여유 있게 1위에 올랐다. UEFA(유럽축구연맹)가 주관하는 각종 유럽 대회에서 78경기와 FIFA(국제축구연맹)가 주관하는 세계 클럽 선수권 대회에서 1경기를 묶어 79경기에서 신들린 듯한 무실점 경기를 펼쳤다(표 참조).
2023-2024시즌에도, 레이나는 2걸음 더 앞으로 나갔다. UEFA 유로파리그 조별 라운드 2차 스타드 렌(프랑스·1-0 승)전과 5차 마카비 하이파(이스라엘·0-0 무)전에서 무실점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이번 시즌 국제 클럽 무대에서, 더는 클린 시트 경기를 보탤 수 없는 레이나다. 유로파리그 16강전에서, 비야레알이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 져(합계 3-5) 탈락함으로써 유럽 대회 여정이 끝났기 때문이다.
레이나는 대망의 ‘클린 시트 80클럽’ 개창에 단 한 걸음만을 남겨 놓았다. 필요한 경기 수는 ‘1’에 불과할망정, 희망스럽지만은 않은 도전의 길이다. GK라는 특수 포지션이긴 해도, 우리 나이로 마흔세 살의 나이가 먼저 떠올려지는 걸림돌이다. 축구 선수에겐 ‘할아버지’로 받아들여지는 나이다. 뿐만 아니다. 레이나가 노익장의 열정을 불사르더라도, 비야레알의 불투명한 2024-2025시즌 전망은 또 다른 암초다. 이번 시즌 라리가에서, 비야레알은 9위(29일 현재)를 달려 다음 시즌 유럽 마당에서 뛰놀 수 있을지 뚜렷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레이나의 기록은 수년 내엔 깨지지 않을 전망이다. 레이나는 2위에 자리한 호제리우 세니에 6걸음을 앞섰다. 표면적으론, 큰 격차가 아니다. 그렇지만 세니는 이미 그라운드를 떠났다. 세니뿐 아니다. 3위 지다(72경기)-4위 에드빈 판 데르 사르(71경기)-잔루이지 부폰(69경기)-6위 이케르 카시야스(65경기) 모두 이미 무대에서 내려왔다.
현역으로서 7위에 오른 모에즈 벤 체리피아와 격차는 상당히 크다. 튀니지의 에스페랑스 스포르티브 드 튀니스 골문을 지키는 체리피아는 60경기에서 클린 시트를 기록했다. 아프리카 마당에서만 올린 수확물이다. 2010-2011시즌부터 14시즌을 뛰며 거둬들였다. 평균 작황치는 4.29다. 그렇다면 산술적으로 단순 대입했을 때, 레이나를 따라잡으려면 4.43년이 필요하다. 물론, 레이나가 더는 클린 시트 경기를 추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가정한 수치다.
레이나는 오래전에 전성기를 누렸다. 리버풀에 둥지를 틀었던 시절,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단일 시즌 최다 클린 시트 GK에게 수여하는 골든 글러브상을 세 시즌(2005-2006~2007-2008) 연속으로 거머쥐며 절정의 시대를 구가한 바 있다.
그래도 변함없이 GK 장갑을 끼고 골문을 지키는 레이나는 분명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존재다. 레이나가 과연 클린 시트 80고지 등정을 이루고 그라운드를 떠날 수 있을지 앞으로 지켜볼 만하다. 그때는 언제쯤일까?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